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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태종의 장자, 양평대군

by 무님 2020.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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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고,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다. 시, 서에 능하였다. 이름은 이제(). 자는 후백(). 태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제()의 딸이며, 부인은 광주 김씨()로 김한로()의 딸이다.

 

1394년(태조 3)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방원()은 정안대군()이었지만, 6년 뒤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양녕대군에게 이런 변화는 수많은 왕자군()에서 독존의 지위를 예약하는 엄청난 행운의 도래였다.

기록되지 않은 사소한 실행() 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20세 무렵까지 매우 순조로운 성장과정을 거쳤다. 그는 10세 때 이제()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1402년[태종 2] 3월 8일), 한 달 뒤 원자에 책봉되었으며(4월 18일), 다시 넉 달 뒤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8월 6일). 세자의 나이가 다소 어렸지만 이처럼 신속하게 후계구도를 결정한 데는 그 사안의 중대성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던 태종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시점을 전후로 양녕대군은 능력과 행실에서 두드러진 결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13세 때 전 총제() 김한로()의 딸과 혼인했고(1407년[태종 7] 7월 13일), 같은 해 9월 25일에는 정조()를 하례하는 진표사(使)로 임명되어 명의 수도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4월 2일에 귀국하는 긴 여정 속에서 그는 국제질서의 동향과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내정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했는데, 재이()로 태종이 집무하지 않을 때는 주요한 국무를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했으며(1409년 1월 8일) 태종이 편찮았을 때는 문소전(殿)의 삭제()를 대행하고 조계()에 참석하기도 했다(1409년 8월 1일).

이처럼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냉철하고 과감한 정치적 결단에 힘입어 차기의 권좌를 예약하는 커다란 행운을 선사 받았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왕세자로서 수준 이상의 능력을 보이면서 그런 행운은 곧 현실화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 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이나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는 등의 자유분방한 풍류 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 같은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으며,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몇 차례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했으나, 끝내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양녕대군의 탈선은 주로 여색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문제는 태종 후반부터 불거졌는데, 1416년(태종 16) 9월 선공부정() 구종수()와 악공() 이오방() 등은 여색을 밝히고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에게 미녀와 매()를 바쳤다가 탄로나 유배에 처해졌다.

그를 폐출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듬해에 일어났다. 그것은 어리()라는 여인과의 염사()였다. 그녀는 전 중추() 곽선()의 첩이었는데, 세자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었다(1417년 2월 15일). 태종은 대노했고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보냈다(2월 17일). 세자는 즉시 개과천선하겠다는 긴 맹세의 글을 종묘와 부왕에게 올렸다. 태종은 세자가 허물을 뉘우친다면서 그날로 환궁하라고 용서했다(2월 22일).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되었다.

세자가 이때 진정으로 반성하고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국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같은 문제를 다시 일으켰고, 이번에는 결정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항명이었다.

이듬해 세자는 어리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번에는 아이까지 갖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418년 5월 10일). 태종은 다시 분노했고, 세자의 출궁과 알현 금지를 명령했다. 장인 김한로도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빼앗기고 죽산(, 지금 경기도 안성)에 부처()되었다.

양녕대군을 폐위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앞서의 맹세문은 당시의 대표적 문장가였던 변계량()이 대신 작성했지만, 이때 세자는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5월 30일). “이 첩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은 적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새 사람이 되어 부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였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라는 태종의 개탄대로, 이것은 중대한 항명이었다. 태종은 그 글을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에게 보이면서 심정을 토로했다. “세자는 그동안 여러 번 불효했지만,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려고 했다. 직접 그 잘못을 지적해 그가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지만,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숨기겠는가?”

세자를 교체해야겠다는 태종의 결심은 이 시점에서 거의 굳어졌다고 판단된다. 국왕의 심중을 파악한 의정부ㆍ삼공신ㆍ육조ㆍ삼군도총제부ㆍ각사 등 거의 모든 주요 신하들은 폐세자를 주청했다(6월 2일). 태종은 양녕대군의 아들 중에서 왕세손을 선정하려고 했지만 영의정 유정현 등은 어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택현〔〕)고 주장했다. 이튿날 태종은 결국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6월 3일).

 

폐출된 양녕대군은 즉시 강화()로 거처가 옮겨졌다(6월 22일).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에서 거주했다.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우려한 신하들은 그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실제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1424년 3월 청주() 호장() 박광()과 같은 해 10월 갑사() 지영우()는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덕을 받게 될 것”이라거나 “그가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등의 난언을 퍼트려 처벌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탄핵이나 난언에 휘둘리지 않았고, 1년에 한 번 정도 그를 불러 우애를 나눴다(예컨대 1432년〔세종 14〕 4월, 1433년 12월, 1434년 1월, 1435년 9월 등). 1438년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 ()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다(10월 17일).

6개월 뒤 양녕대군은 단종 의 사사라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영의정 정인지()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 ()ㆍ송현수 () 등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고, 역시 윤허를 얻어냈다. 이런 문제들은 그의 개입이 없었어도 결국은 관철될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종친을 대표한 양녕대군의 적극적인 발언은 그것의 실현을 촉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 등극한 세조가 양녕대군을 후대한 것은 당연했다. 만년에 양녕대군은 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관찰사와 환관 등을 보내 극진히 수행케 했다. 또한 양녕대군이 죽음을 앞두고 병고에 시달리자 그의 서자인 이순()과 이심()을 승진시켜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1462년〔세조 8〕 6월 24일).

 

양녕대군 묘

 

양녕대군은 1462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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