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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6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1. 정난정 -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였다.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과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 2020. 12. 10.
숙종 15년 기사환국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 남인(南人)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이며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王妃: 仁敬王后)로 맞았으나 1680년 10월에 왕비가 죽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 仁顯王后)로 맞았다. 그 때 김만기·민유중 등은 모두 노론계였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게 된다. 발단은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아직 강보에 싸인 후궁 소생의 왕자에.. 2020. 7. 8.
남인(南人)의 영수, 고학(古學)에 심취하다 < 허 목 >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후기 강성 정치인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었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세계를 추구한 허목의 학문과 정치활동 속으로 들어가 본다. 허목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 2020. 6. 27.
일생을 당쟁으로 살던 < 고산 윤선도 >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는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惟幾)의 양자이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鄕試)와 진사시(進士.. 2020. 6. 26.
효종에서 숙종으로 < 북벌론 > 조선의 군사력을 길러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효종 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계획으로 마련되어 숙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청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계획이었지만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게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전쟁 준비를 하긴 했으나(이는 실록에서도 꽤 보인다.)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의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에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는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 2020. 6. 12.
조선 17대 왕 효종 - 이호 조선 제17대 왕(재위 1649∼1659).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의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부인은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왕후 덕수 장씨이다.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효종은 인.. 2020.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