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난정 -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였다.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과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 사(賜死)됨으로써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1551년(명종 6)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嫡妻)가 되었다.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 보우(普雨)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인(賤人)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몸에 지니고 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이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2. 조식 - 1648(인조 26)∼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지정(持正). 조공립(趙恭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흠(趙嶔)이고, 아버지는 조이건(趙以乾)이며, 어머니는 남두화(南斗華)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 문과에 장원하여 바로 정6품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으나, 고묘론(告廟論)에 대한 상소 주도로 대사간 정재희(鄭載禧)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였다. 그 뒤 1689년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이광한(李光漢)·김익훈(金益勳) 등 노론계의 훈적(勳籍: 공훈의 내용을 기록한 명단) 삭제를 주창했고, 이어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였으며, 남구만(南九萬)을 중도부처(中道付處)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차사(箚辭)가 과격하여 귀양가게 된 이상진(李尙眞)을 구하기 위한 소(疏)로 체직(遞職)된 뒤 복직되었다가 지평으로 제수되었고, 1690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된 뒤 다시 사헌부지평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부교리로 재직 중 전라도를 비밀리에 염찰(廉察)하고 돌아와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다. 1692년 공조참의를 거쳐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694년 수원부사(水原府使) 재직 중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있자 장령(掌令) 유집일(兪集一) 등의 탄핵을 받았고, 이어 대관(臺官)으로 재직시 노론 대신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의 안률(按律: 죄안을 고찰함)을 먼저 발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갔다가 1697년 석방되었다. 1702년 65세의 노구로 종성부사(鍾城府使)를 그만둔 뒤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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