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윤경 - 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다. 아버지는 수찬(修撰)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이준경(李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이수정이 화를 입자 온 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 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중종 2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했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의 재실시를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해 「운간이사군(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했다 한다. 이 때 아들 이중열(李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자, 이로 인해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해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해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2. 이항 - 조선전기 사옹원정, 사헌부장령, 장악원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아버지는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인 이자영(李自英)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소경전참봉 최인우(崔仁遇)의 딸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다.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인으로 돌아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 (奇大升)ㆍ김인후(金麟厚)ㆍ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을 일체라고 주장해 이황(李滉)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왕에게 진학(進學)과 치지(致知)하는 방법을 진언하여 칭찬을 받았다. 이후 의영고령(義盈庫令)을 지내고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부임할 때 왕이 귀마개를 하사해 노고를 위로하였다. 1567년 5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오니 왕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초년에 의빈경력을 지내고 선공감부정ㆍ사옹원정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 7) 사헌부장령을 거쳐 장악원정을 지냈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 뒤 5도의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고, 왕이 네 차례나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결국 완쾌되지 못하였다.
이황(李滉)은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지나친 자신감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 홍직필(洪直弼)은 『매산집(梅山集)』에서 김인후, 기대승, 안방준, 박광일과 함께 그를 '호남의 다섯학자[湖南之五學]'로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 임꺽정 - 조선 중기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천민인 백정 출신이며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후 명종 대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이 자신의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이다. 그를 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소설책과 영화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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