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인숙 - 조선전기 한성부우윤, 공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명(原明), 호는 정수(靜叟). 유의(柳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종식(柳宗植)이다. 아버지는 사간 유문통(柳文通)이며, 어머니는 이추(李抽)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했고, 1510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이조좌랑·직제학 등을 거쳐 1515년 홍문관부수찬·전한이 되었다. 이 때 사림파의 일원인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유배되자, 이들의 치죄를 둘러싸고 찬반의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신씨 복위 문제를 넘어서 신구 세력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했는데, 사림파를 대표해 이들의 치죄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어서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11월 김정의 후임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반대 세력인 박호(朴壕) 등의 반대로 철회되었다. 다음해 좌승지를 거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때 대간이 경연에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동지사(同知事) 조광조(趙光祖)도 불가하다고 하자 학식이 없음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당시 사림파의 핵심 인물인 조광조·김정·김구(金絿)·김식(金湜) 등은 성균관과 홍문관을 번갈아가면서 장악해 그들의 세력을 더욱 굳히려고 하였다. 그런데 유인숙의 부제학 임명에 조광조 등이 적극 반대한 것은 사림파내의 세력 다툼 때문이었다.
이어서 도승지에 승진했으나, 같은 해 11월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일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조광조 등을 위해 적극 변명하였다. 그 뒤 호조참의가 되었으나 기묘당인(己卯黨人)으로 대간의 탄핵을 계속 받다가, 2년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태를 관망했다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파면되었다. 그 뒤 1537년 재서용되어 병조참의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한성부우윤·호조참판·대사헌·한성부좌윤·대사간, 형조·호조·이조·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 우찬성에 올랐다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과 함께 종사를 모위했다는 죄목으로 무장으로 귀양가던 도중 진위 갈원(振威葛院)에서 사사되었다.
같은 해 9월 김명윤(金明胤)의 밀고로, 윤임·유관 등과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의 추대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네 아들도 모두 교살되었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선조 때 성균관 유생과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한 대신들의 상소로 신원, 복관되었고, 유인숙을 모함했던 이기·정순붕 등은 위훈이 삭제되었다. 일찍이 김정과 함께 김정국(金正國) 등의 사림파를 조정에 추천하는 데 적극 앞장서기도 했으나,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20여 년간 재야에 있었다.
다시 서용된 뒤에는 사림의 기대를 받았으나 근신하지 못하고 자주 뇌물을 받아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연에 입시해서는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부진해진 성리학의 진흥에 노력할 것을 촉구했고, 궁중 세력과 결탁한 간신배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힘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 이량 -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왕족이자 척신으로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심의겸 등에 의해 탄핵되었다. 윤원형ㆍ심통원과 함께 명종 때에 외척으로서 전횡을 한 삼흉(三凶)으로 지칭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공거(公擧)이다.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대손으로 부친은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1543)이며, 모친은 정종보(鄭宗輔)의 딸인 동래 정씨이다.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 17일에 이대의 8남 1녀 가운데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대의 고명딸은 심강(沈鋼)에게 출가하여 명종의 정비인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1532~1575)를 낳았다. 따라서 이량(李樑)은 왕족이면서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이라는 신분도 함께 지녔다.
정사룡(鄭士龍)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2)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에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승정원(承政院),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등에서 헌납(獻納), 수찬(修撰), 교리(校理), 지평(持平) 등의 언관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배경으로 세력이 커진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이량을 중용하였다. 그래서 이량은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명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조정의 정사와 인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59년(명종 14)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된 이량은 이듬해에는 사간원의 대사간(大司諫),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등을 역임했다. 1561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파견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참판, 예조판서(禮曹判書),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이처럼 이량은 척신(戚臣)으로서 정유길(鄭惟吉)·고맹영(高孟英)·김백균(金百鈞) 등과 당파를 만들어 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량은 1563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는데, 당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던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은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전직되었다. 이량은 이정빈의 친구인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이조좌랑으로 추천하여 기대승(奇大升)과 허엽(許曄) 등 사림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를 계기로 이량은 허엽과 기대승, 이산해(李山海), 윤근수(尹根壽)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그들과 가까웠던 심강(沈鋼)과 심의겸(沈義謙) 부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리고 이량은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권신(權信)·윤백원(尹百源)·이영(李翎) 등과 함께 이른바 ‘육간(六奸)’으로 몰려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명종과 인순왕후는 이량을 유배에서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림 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량은 유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82년(선조 15) 음력 3월 8일에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사망하였다.
이량은 윤원형, 심통원과 함께 명종 때에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척신으로 그들과 함께 ‘삼흉(三凶)’으로 불리며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정빈도 이량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으나, 손자인 이충(李沖)과 이명(李溟)은 광해군 때에 서용되어 각기 벼슬이 우찬성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량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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