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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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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벌 - 조선전기 의정부좌참찬, 의정부우찬성, 원상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안동 출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 호는 충재()·훤정()·송정(). 할아버지는 부호조() 권곤()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권사빈()이며, 어머니는 주부(簿) 윤당()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박영문()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이 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이듬 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7월에는 종계변무(: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에 관한 일로 주청사(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 병조판서·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년)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에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의 세력이 대윤 윤임()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유관()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에 책록되고, 길원군()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이어 태천()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에 이배()되었으며, 이듬 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직기간 동안 그는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김정국() 등의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과 『근사록()』을 항상 품 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저서로는 『충재문집()』이 있다.

1567년 신원()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2. 김인후 - 조선전기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 제술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 호는 하서(西)·담재(). 아버지는 참봉 김령()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되었으며, 이듬 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죽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인후는 당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과 도심()은 모두 그 동처()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김인후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과 함께 숙흥야매잠해()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을 주장하였다.

김인후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변성온()·기효간()·조희문()·오건()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西)』·『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西)』·『백련초해()』 등이 있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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