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세붕 -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漆原)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周尙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周長孫)이고, 아버지는 주문보(周文俌)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1537년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다. 승문원교리·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주박(周博)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학문이 높고 성균관의 사표로 삼을만한 인물이라 하여 내직을 요청할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당하던 향교 대신 풍기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였다. 서원을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림과 안향의 후손들을 제외하고 풍기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는데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한 안향의 11대 손인 안현(安玹)의 노력으로 백운동서원은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백운동서원은 점차 풍기 사림의 중심 기구로 변모해나갔다. 이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2. 채무택 - ∼1537(중종 32).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초명은 무역(無斁). 자는 언성(彦誠). 채신보(蔡申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연(蔡年)이고, 아버지는 채준(蔡浚)이며, 어머니는 김여영(金麗英)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부교리·장령·응교 등을 거쳐 1535년 대사간, 그리고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 재임 중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당여(黨與)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여 화를 입히고, 또한 조정의 상하 신하들까지 이간시키는 등 분규를 일으킴이 심하여 김안로·허항(許沆)과 함께 3흉(凶)으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김안로·허항과 함께 1537년문정왕후(文定王后) 폐위를 모의하다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3. 허항 - 1497(연산군 3)∼1537(중종 32).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중(淸仲). 허손(許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허종(許琮)이고, 아버지는 부사 허확(許確)이며, 어머니는 김수조(金守祖)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1년(중종 26) 정언이 되고 그뒤 부교리·지평·사인·부응교·전한·부제학·동부승지를 거쳤다. 1535년(중종 30) 대사헌에 오르고, 1536년(중종 31)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김안로(金安老)가 재집권하자 채무택(蔡無擇)과 함께 김안로를 도와 반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농단하였다.
성품이 간사하면서 교활하고 음흉하여 간신 김안로의 일당이 되어 옥사(獄事)를 함부로 일으키고 무고한 사림(士林)을 반역죄로 몰아 죽였으므로 세상에서 김안로·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이라 불렀다. 김안로가 물러나자 사사(賜死)되었다.
4. 홍경주 - ?∼1521(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제옹(濟翁). 홍척(洪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정(洪淀)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암군수(行靈巖郡守) 홍임(洪任)이며, 어머니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가 딸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를 거쳐 1504년 지평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1506년(중종 1)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을 도모하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동부승지에 올랐다. 곧 이어 도승지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이듬 해에는 견성군(甄城君: 성종의 아들)을 옹립하려던 이과(李顆)의 난을 다스린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해 경연에서 국사를 논의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잠시 옮겼다가, 호조판서·좌참찬·좌찬성 등을 지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해서 정부 요로에 대거 등용된 사림들이 훈구세력을 비판하며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1516년 그는 정국공신의 명단을 개정하는 척하면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하였다. 당시 남곤·심정 등은 홍경주의 딸 희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조광조를 모략하였다. 그리고 홍경주는 훈구세력을 대표해 조광조의 일파를 처형해야 한다고 밀고했던 것이다.
이때 죽은 사람을 후일 기묘명현이라 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을 다시 역임하고, 1521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도열(度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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