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최진흥(崔震興), 생7대조는 최진립(崔震立)이다. 6대조 승사랑(承仕郞) 최동길(崔東吉)은 최진립의 4남으로, 최진흥의 후사가 되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부친 최옥과 모친인 과부 한씨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전한다. 최제우는 어려서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였으나, 17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궁핍해져 유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유랑 생활 동안 최제우는 장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술이나 점복술을 접하였다. 이때 최제우는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고자 무술을 익혀 무과에 응시하려고 생각했다고도 한다. 고뇌와 방랑의 시기를 경험한 최제우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의 혼란한 대내외적인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한울님의 뜻이라 생각하고는 구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최제우는 양산의 천성산 내원암 및 적멸굴과 울산 등지를 전전하며 수련을 진행하다가 1859년 처자를 데리고 경주로 돌아왔다. 이즈음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고쳤다. 고향 인근의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지속하던 최제우에게 급기야 1860년 4월 5일(음력)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 시작하면서 한울님의 말씀이 들렸다. 득도의 순간이자, 동학이 창시되는 순간으로, 이 시점을 동학(후일의 천도교)에서는 포덕 원년이라 칭한다. 최제우는 득도 이후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동학의 이론화 작업에도 착수하여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만들었다. 한문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동경대전]은 지식인층을 위한 경전이고, 가사체 형식으로 이루어진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1861년 지역의 유생들에게 서학(西學)으로 몰려 경주를 떠났다. 울산, 부산을 거쳐 남원 은적암(隱寂庵)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 무렵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등을 저술하며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경주로 돌아와 포교를 하다가 관아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으나 풀려나와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자 경주·영덕·대구·청도·울산 등지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敎徒)를 관장하게 했는데, 1863년에는 접소가 14곳, 교도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성장해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자 1863년 8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해 도통(道統)을 잇게 했다. 자신은 포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4월 15일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경주 가정리 구미산(龜尾山)에 묘가 있으며, 1907년에 사면(赦免)되었다.
* 동학의 사상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서, 그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21자로 나타냈다. 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天主)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최제우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기(至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으로 그 지극한 기(氣)를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 따라 하늘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최제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의 방법으로는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하였다.
또한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했으며,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라고 하였다. 그는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따른 조화를 강조하였다.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조화는 정해져 있다. 곧 음(陰)과 양(陽)이 조화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로써 최제우는 사회 질서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이처럼 최제우는 시천주 상에 기초하여 민중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고취하였다. 그리고 여러 민중 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事人如天)’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조선 인물 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는 조선의 국모다 ' 명성황후 < 민자영 > (0) | 2020.11.07 |
---|---|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1.05 |
인종, 명종시대 관련 인물 (0) | 2020.10.30 |
중종시대 관련 인물 (0) | 2020.10.28 |
중종시대 관련 인물 (0) | 2020.10.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