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빈 김씨 -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년 11월 16일 ~ 1577년 6월 13일) 또는 공성왕후(恭聖王后)는 조선의 제 14대 임금 선조의 빈이자 추존왕후이며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생모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고, 1616년 8월 4일 존호로 경렬 명순(敬烈明順)이 추상되었으나 광해군 폐위 후 시호 및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존호는 경렬명헌(敬烈明獻)이다. 본관은 김해이다.
사포(司圃)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 해령부원군(議政府 領議政 海寧府院君)에 추증된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1553년 11월 16일 (음력 10월 11일)에 태어났다. 종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 형제의 주변에 힘이 되어줄 만한 인물들이 없어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그녀는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그 때문에 다른 후궁들은 선조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독해지자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며 이를 선조가 조사하지 않아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선조에게 아뢰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난 후 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하였다. 그런 왕을 소용 김씨(昭容 金氏)가 극진히 모셔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소용 김씨는 왕에게 공빈의 허물을 자주 들춰내었고, 이 때문에 선조는 공빈을 애도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지게 되었다. 훗날 인빈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이전에 공빈에 대한 것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572년(선조 5년)에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낳았으며, 서차자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인 1577년(선조 10년) 6월 13일(음력 5월 27일)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임해군은 선조의 첫 아들이었으나 성정이 난폭하고 방탕하여 세자에 오르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이후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그녀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으며, 능호는 성릉(成陵)이라 하였다. 1613년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고명을 받아오기도 했다. 1615년(광해군 7년) 경렬(敬烈), 1616년(광해군 8년) 명헌(明獻)이라는 존호가 각각 더해졌다. 1616년 8월 4일 다시 경렬 명순(敬烈明順)이 더해져 경렬명순명헌자숙단인공성왕후(敬烈明順明獻慈淑端仁恭聖王后) 가 되었다. 그러나 1623년(광해군 15년) 3월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위치도 빈으로 돌아갔고 그녀의 왕후로서의 시호와 능호도 모두 추탈되고 격하되었다. 다만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그녀의 묘인 성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으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묘소 아래에는 원래 있던 조맹(趙孟)의 묘가 있다.
2. 인빈 김씨 -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아버지는 감찰 한우(漢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이성(李誠)의 딸이다.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淑儀李氏)의 외종(外從)으로 궁중에서 자라났는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보고 기특히 여겨 선조에게 부탁하여 후궁으로 두게 하였다. 이때 나이 14세였다.
후궁 가운데에서 가장 왕의 총애를 받아 정원군(定遠君)주 01)을 포함, 4남 5녀를 두었다. 영조 때 시호를 경혜(敬惠), 궁을 저경(儲慶), 무덤은 순강원(順康園)으로 정하였다.
3. 고경명 - 조선전기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며 문신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고자검(高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이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서산군수로 전임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천거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官軍)을 모았다.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해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담양을 출발해 북상을 개시했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고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했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해 고인후에게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했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고종후·고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했다. 27일 은진에 도달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당초의 북상 계획을 변경, 7월 1일연산(連山)으로 회군했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해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해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곽영과 합세해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로 선제 공격을 했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했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후퇴해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해 금산 산중에 매장했으며, 10월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 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했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고경명을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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