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종후 - 1554(명종 9)∼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전적·감찰·예조좌랑을 거쳐 1588년 임피현령(臨陂縣令)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知製敎)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인 광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했다. 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광주목사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
이 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 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는데,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
도승지에 이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2. 곽재우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159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 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문화체육부가 제정한 1995년 12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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