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응수 - 조선시대 경상도병마좌별장, 충청도 방어사, 경상도방어사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며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경상북도 영천 신녕 출신. 아버지는 권덕신(權德臣)이다.
1583년 별시무과에 급제,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를 거쳐 훈련원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 용만을 지켰으며, 그 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가 의병을 모집하여 궐기했다. 이 해 5월부터 활동을 전개해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해 의병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영·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 적을 박연(朴淵)에서 치고,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한편 이날 군세를 정비하고 영천성 공격을 위해 선봉장에 홍천뢰(洪天賚), 좌총(左摠)을 신해(申海), 우총(右摠)을 최문병(崔文柄), 중총(中摠)을 정대임(鄭大任), 별장(別將)을 김윤국(金潤國)으로 삼았다.
25일 군사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하고 26일에는 결사대원 500명을 뽑아 적진으로 돌격해 크게 격파했다. 다음 날에는 화공(火攻)으로 대승, 영천성을 수복했다. 그 뒤 신령·의흥·의성·안동의 적은 모두 한 곳에 모였고, 영천의 적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그 공으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우후가 되었다. 그 뒤 좌병사 박진의 휘하에 들어가 8월 20일 제2차 경주탈환전의 선봉으로 참가했으나 패전했다. 12월에는 좌도조방장으로 승진했다.
1593년 2월에는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7군의 군사를 합세해 문경 당교(唐橋)에서 적을 대파하고, 25일에는 산양탑전(山陽塔前)에서 적병 100여 명의 목을 베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4월에 안동의 모은루(慕恩樓) 밑에서 적을 크게 격파한 다음 구담(九潭)까지 추격해 적 100여 명을 사살했고, 7월에는 밀양의 적을 격파했다. 9월에는 좌도방어사로 특진되었다.
1594년 정월에는 경상도병마좌별장이 되고, 4월에는 황룡사(黃龍寺) 부근에서 적을 격파했다. 7월에는 충청도방어사를 겸직하고 이사명(李思命)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고 은진현감 이곡(李穀)과 함께 창암(倉巖)에서 가토[加藤淸正]군을 대파했다. 1595년 정월에는 경상좌도방어사를 겸했고, 4월에는 형강(兄江)에서 적을 대파했다. 1597년 9월 정유재란 때 관찰사 이용순(李用淳),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같이 달성까지 추격했다. 11월에는 왕명으로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을 따라 함경·강원 양로(兩路)의 병을 거느렸다.
경리(經理)인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를 따라 1·2차 울산 전투에 참가했다. 1599년 밀양부사를 겸하고, 다음해 의흥위부사직(義興衛副司直), 1603년 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에 오르고 경연에 입시했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책록,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도총부도총관이 된 뒤 1606년 경상도방어사, 1608년 남영장(南營將)을 겸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신령의 경덕사(敬德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2. 기대승 -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 등을 가리킨다.)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 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 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왕복서(往復書)』·『이기왕복서』·『주자문록(朱子文錄)』·『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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