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덕령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 그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2. 김면 - 조선시대 『송암실기』를 저술한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경상북도 고령 출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아버지는 경원부사 김세문(金世文)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판관 김중손(金仲孫)의 딸이다.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때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선조 즉위 초년 유현(儒賢)을 뽑아 육품직에 승진시켰는데, 조목(趙穆)·성혼(成渾)·정구(鄭逑) 등과 함께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사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곽준,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공으로 합천군수에 제수되었다. 그 뒤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9월에는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고, 11월에는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당시 호남관찰사에게 군사와 군량을 요청했으나 회답이 없자 스스로 무기를 수선하고 병사를 격려하여 전투에 임했으며, 호남과 영남의 의병장들과 함께 4도로 진병하고자 했으나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자 혼자 군사를 이끌고 고령·지례·금산·의령 등을 수복하였다. 왕이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 이 군사들에게 근왕(勤王: 왕의 곁에서 호위하는 일)할 것을 명했으나, 백성들이 통곡하며 보호를 청하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장계를 올리니 본도에 머물러 수호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주둔하며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던 도중, 갑자기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러 장수가 그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신창(新倉)까지 돌아온 뒤에야 그의 죽음을 알리니, 군사들이 통곡하고 백성들이 매우 애통해하였다. 관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왕이 애도하며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 왕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지내던 일)하게 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를 명하였다.
강직한 절의를 지니고 있었고, 문장보다 성현의 본지(本旨)를 마음에 새기어 실천에 힘썼으며, 특히 이정(二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글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실기(松庵實紀)』가 있다.
고령의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으며, 1607년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 김명원 -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김치세(金致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김천령(金千齡)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현감 안준의(安尊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했고, 1561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량(李樑)에게 미움을 사 형 김경원(金慶元)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헌납·지평·교리·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68년 함경도의 군무를 순안할 때 산천의 형편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고 요해지(要害地)의 방비 등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해 종성부사가 되었고, 그 뒤 동래부사·판결사·형조참의·나주목사·정주목사를 지냈다.
1579년 의주목사가 되고 이어 평안병사·호조참판·전라감사·한성부좌윤·경기감사·병조참판을 거쳐, 1584년 함경감사·형조판서·도총관을 지냈다. 1587년 우참찬으로 승진했고, 이 때 왜구가 녹도(鹿島)를 함락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이를 퇴치하였다. 이어 형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쳐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에 이어 팔도도원수가 되어 한강 및 임진강을 방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막지 못하고 적의 침공만을 지연시켰다.
평양이 함락된 뒤 순안에 주둔해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힘썼다. 이듬해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고, 그 뒤 호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했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병서와 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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