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은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48년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권력이 홍국영에게 집중되었고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정조 즉위 초기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홍국영을 내세워 안정적 권력 기반을 구축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총애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권좌에서 내치기 전까지 도승지의 직책을 겸임시켰다. 도승지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국왕의 뜻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홍국영의 말은 곧 정조의 말이었던 것이다. 홍국영은 당쟁의 세력관계를 교묘히 활용해서 힘있는 세도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처음에 홍국영은 노론의 청명당 계열인 김종수·정이환(鄭履煥) 등과 합세하여 노론 탕평당 계열의 홍인한·정후겸·윤양후·홍계능 세력을 제거했고, 이후 정순왕후의 친동생인 경주 김씨의 외척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공격했으며, 다시 김귀주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어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원조 홍영국
구 정치세력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홍국영은 자신이 노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홍국영은 노론의 주장을 앞장서서 펴 나갔다. 그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가 병신처분을 내린 지 60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내세워,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주장했다. 결국 홍국영은 다음 해에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노론의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은 정조에게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이의연(李義淵)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노론계 학자 김창흡(金昌翕)·이재 등의 벼슬도 다시 높였다. 또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송환억 등을 조정에 불러 올려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론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반면에 홍국영은 노론 내에서 자기에게 적대적인 홍계능·홍양해·김한록·송능상(宋能相)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송시열 계라 할지라도 제거 또는 그 힘을 약화시켰다.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 위상을 강화하는 동시에 소론을 심하게 압박했다. 그는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관직을 박탈했으며, 정조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소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로써 소론의 정체성을 약화시켰으며, 소론계 인사들이 노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우게 유도하는 동시에 소론으로부터 노론으로 아예 당을 바꾸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관직에 대한 실질적 임면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영조 때 폐지된 통청권(이조전랑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을 부활시켰다. 이는 영조가 특정 붕당이 관직을 독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탕평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폐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은 자기 중심의 일사불란한 관직 독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 제도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로써 주자의 성리학을 토대로 송나라의 국가운영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노론의 오랜 숙원이 실현될 수 있었고,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다.
홍국영은 궁중에까지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1778년(정조2년) 당시까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작호는 원빈(元嬪)이었다. 이는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서인의 기본적인 정략관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고, 이로써 홍국영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차기를 노리는 권력투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계책을 하나씩 실행할 수 있었고,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홍국영을 찾아보아야 했고, 홍국영의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노론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홍국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상 김종수의 이 말은 정조의 의중을 반영한 말이다. 정조는 그만큼 홍국영을 믿고 총애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1779년(정조3년) 9월 26일,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바로 그 날에, 정조는 홍국영을 불러들였다. 정조를 만나고 나서 홍국영은 곧바로 "신이 한 번 대궐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 하늘의 신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라는 정계은퇴의 상소를 올리고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奉朝賀) 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가 생겼도다." 라는 말로써 홍국영의 낙향을 허락했다. 홍국영이 권좌에서 물러나 정계 원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좋은 말로 정계 원로요 봉조하지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었고, 권력을 상실한 홍국영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채 여기 저기 떠돌았다. 그는 경기도 해변가를 비롯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강릉 근처의 동해안에 거처를 정했다. 그곳에서 홍국영은 매일 술을 마시고 산에 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 해(1780년) 33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례이다. 차기 정권까지를 겨냥했던 홍국영은 자신이 철저히 믿고 있었던 정조에 의해 3년만에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했다. 정조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서 홍국영을 정계은퇴시켜 버린 것은 그가 왕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홍국영이 물러난 직접적인 계기는, 1779년(정조3년) 5월에 그의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그가 정조의 왕비인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해서 핍박한 사건 때문이다.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 없이 의심했다. 또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했다. 이에 따라 궁궐 내 거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미워하며 적대시하게 되었다.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인 것도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예컨대 홍국영은 숙위대장으로 궁궐에 머물며 일할 때, 아무리 나이 많은 상급 관리가 나타나도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정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入朝)를 명했다. 홍국영도 정조의 갑작스런 명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법하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은 곧바로 은퇴의 뜻을 밝히는 소를 올렸다. “저는 7년 간 국가의 일을 맡았는데, 그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이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한 번 궐문을 나가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자진 은퇴 형식이었지만, 실은 정조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즉시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던가, 그리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
봉조하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이었다. 죄를 물어 벌주지 않고 자진 은퇴 형식을 취하게 한 것.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을까.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홍국영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지난 날 외척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왕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탕평 노선을 추구하는 정조의 정치 방향과도 맞지 않았다. 그는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 홍영국의 말로
홍국영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들은 크게 득세한 반면, 홍국영의 은퇴에 대해 동정하거나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홍국영 자신도 결국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다.이후 홍국영은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며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면서 울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고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1781년 4월, 홍국영은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울화병이었으리란 추측이 많다. 29살 때부터 32살 때까지 약 3년 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누린 홍국영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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