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려이야기

고려 2대 왕 혜종 - 주름살 왕으로 불리다

by 무님 2021. 3. 24.
728x90

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 자는 승건이다. 태조의 제1비 신폐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태자 무의 출생과 관련하여 < 고려사 >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다.

 

'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때 왕건은 비록 동침은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염려하여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것을 즉시 흡수하여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달 후 아이를 낳았더니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

 

물론 이것은 혜종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무리들이 고의로 퍼뜨린 악의 섞인 이야기일 것이다. 혜종의 얼굴에 유난히 주름살이 많은 것과 장화왕후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연결지어 그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노림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으로 공공연히 살렸던 것을 보면 당시 혜종이 받은 수모가 얼마나 지대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혜종은 이 우스꽝스러운 출생담 때문에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은 단지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친모 오씨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빗대고, 한편으로 이복동생들의 왕권 위협에 시달려 고민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혜종의 재위 기간인 2년 4개월은 늘 위태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혜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점

태조가 죽자 혜종은 왕위 계승에 불만을 세력을 견제하고자 박술희를 대광으로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와요 일파의 왕권 위협은 가속화 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송악산 동쪽 기슭 순릉에 묻혔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병명도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호위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점으로 미루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실록'을 바탕으로 쓴 < 고려사 >는 혜종의 이 같은 행위와 당시 혼란에 대한 책임을 모두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해 놓고 있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침입케 하여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 간 박술희를 죽였다는 내용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장치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고려사>는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혜종을 협박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역모를 꾸몄다고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이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광주원군을 앞세웠다면 왕규가 제거될 때 필히 광주원군도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데, <고려사>는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 >는 단지 실록에 광주원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만 쓰고 있다.

 

<고려사>는 왕규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때 왕규를 체포하여 귀양 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했다. 하지만 <고려사>의 이 같은 서술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만약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필시 군사를 일으켰을 것인데, <고려사>는 그런 내용을 전혀 싣고 있지 않다. <고려사>는 단지 왕규가 반란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다.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적어도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먼 곳에 있던 서경 군대가 도성을 먼저 장악했고, 당시 대광 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식렴에게 쉽게 붙잡였다. 이는 왕규가 반란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되려 왕식렴이 반란군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왕식렴의 서경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대신들과 개경 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쌋던 것이다.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으로 진주했을 땐 이미 혜종은 병사했거나 살해당한 이후였고, 왕성 또한 왕요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요 일파는 왕요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던 왕규와 문무 대시관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박술희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고, 또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것은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죽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운, 그야말로 성패론에 입각해서 작성된 날조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사료를 통한 정황 분석은 혜종이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왕요 일파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규와 박술희를 비롯한 문무대신들을 역도로 몰아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