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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의 개국공신 4인방

by 무님 2021.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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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4인방이 있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이들은 모두 기병대장들었다. 이들은 궁예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던 장군들이었으나 날로 심패지는 궁예의 비정상적인 학정에 반기를 들게 된다.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자 더 이상 궁예를 섬길 수 없다는 판단에 덕망이 높고 세력이 강한 왕건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종용한다.

왕건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네 사람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왕성으로 쳐들어가 궁예를 몰아내게 된다. 

 

 

1. 홍유 ( ?~936년 )

 

 

 

 

홍유는 남북국 시대 태봉의 수도인 철원 지역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옹립한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홍유()[?~?]의 본관은 의성()이며, 시호는 충렬()이다. 어릴 적 이름은 『고려사()』에 홍술()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홍술()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의 관인이 된 후 중국식 성씨 문화의 영향을 받아 홍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대나 처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딸은 태조() 왕건의 제26비인 의성부원부인() 홍씨()이다. 의성부원부인 홍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아들 의성부원대군()을 낳았다.

 

고려 건국 이후 홍유는 유능한 무장으로 활약하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918년 7월에는 고려에 귀부한 청주에서 변란의 조짐이 보이자 유금필() 등과 함께 병사 1,500명을 이끌고 진주에 주둔하며 청주 사람들을 제어하였다. 이듬해인 919년 6월 예산현에 파견되어 유민 500여 호를 정착시켰고, 936년 9월에는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여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마군() 1만 명을 통솔하며 후백제()의 신검()을 격퇴하였다.
일리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고려군은 황산군까지 퇴각한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신검의 항복을 받았고, 이로써 후삼국은 통일되었다.

마군장군()으로 신숭겸()·복지겸()·배현경()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918년(태조 원년)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유금필()과 함께 병사 1,500명을 거느리고 진주()에 주둔하며 대비하였다. 이 때문에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아 대상()에 올랐다.

이듬해인 919년(태조 2)에는 오산성()을 고쳐 예산현으로 하자 대상() 애선()과 함께 유민() 500여 호를 옮겨 안정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어 대상에서 태사 삼중대광()으로 올랐다.

그의 딸이 태조의 제26비 의성부원부인()이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낳으면서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936년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대상으로서 마군을 거느리고 우강()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웠다.

 

홍유는 왕건 옹립을 주도한 공으로 918년 8월 고려 개국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사망한 뒤에는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994년(성종 13) 배현경·복지겸·신숭겸·유금필과 함께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027년 현종이 선왕과 선후의 존호를 올리고 태묘를 정비하였을 때에도 홍유는 기존의 네 장군 및 최응()과 함께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 배현경 ( ?~936년)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이다.

초명 백옥삼(:). 시호 무열(). 원래 군졸이었으나 담력이 있어 몸을 일으켰다.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마군장군()이 되었다. 궁예의 계속된 포악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홍유()·신숭겸()·복지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그 뒤로도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많이 세웠고, 태조 즉위 후에 1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려 개국 이후 통일 작업이 지속되면서 그는 때론 장수로서,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재상격인 대광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도 홍유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그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994년(성종 13) 태사()로 추증되어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 제왕을 제사지낸 마전()의 숭의전(殿)에 배향되었으며, 그 밖에 나주의 초동사(), 평산 태백산성의 태사사() 등에 배향되었다.

 

 

 

3. 신숭겸 ( ?~927년 )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신숭겸은 고려의 장군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태조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태조 1년(918)에 1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태조 10년(927)년에 있었던 후백제와의 공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다.

신숭겸의 초명 능산(). 시호 장절(). 평산씨()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 출생으로, 《고려사》에는 광해주(: )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를 잡았다. 

 

918년 태봉()의 기장()으로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협력,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이렇듯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장 신숭겸과 김락 등이 힘써 싸우다 모두 죽고, 왕건 역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의 대신 죽음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든 디딤돌이었고, 중세 사회 내내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신숭겸은 죽은 후 머리가 잘려 시신만으로는 그를 구분할 수 없었는데, 유금필이 “신숭겸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 무늬가 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다”는 신체적 특징을 근거로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고, 이에 목공()을 시켜 얼굴을 새겨 만든 다음 조복()을 갖추어 입혀 신숭겸의 출신지인 춘천(광해주) 비방동에 묘소를 정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공산 전투 현장과 가까운 현 대구시 동구 지묘동 위치에 지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고, 신숭겸에게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에 태사()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곡성()의 양덕사(), 대구광역시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 평산()의 태백산성사()에 제향되었다.

 

 

 

4. 복지겸 ( 생몰년 미상 )

 

 

복지겸 사당 무공사

 

 

 

복지겸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복지겸의 윗대에 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輿)』의 인물 조에 딱 네 줄 나와 있는 게 전부다. 짧은 글 줄이지만 붙잡고 더듬어 보기로 하자.
“신라 말 복학사라는 자가 당나라로부터와 여기에 살았는데, 능히 해적을 무찌르고 유민들을 모아 보호하였다. 지겸은 그 후손이다. 처음 이름은 사괴()로 배현경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본주 밭 삼백 경을 하사받아 자손에게 식읍()으로 하게 하였다. 시호는 무공이고, 후에 태사에 증직되었다[(복지겸신라말유칭복학사자자당래거우차능초살해적보취유민지겸기후야초명사괴여배현경추대태조위개국공신사본주전삼백경자손세식지시무공증태사)].”
이 기록에서 우리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복지겸의 선계()는 당나라에서 왔다는 것, 해적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 세력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복지겸의 일화이다.

면천면 동문 1길 3[성상리 772-1]에는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두견주와 함께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 속의 나무다. 복지겸이 늙어서 병이 깊어 무슨 약을 써도 효험이 없을 때 딸이 백일기도 끝에, 비몽사몽간에 뜰에 두 그루 은행나무를 심고, 아미산()에 핀 진달래를 따다가 안샘물로 술을 빚어, 백일 후에 드리라는 신령의 계시를 받고 그대로 해서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은행나무와 함께 안샘도 남아 있다. 안샘은 옷샘, 내정(), 화정()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 나온 『면천읍지』에 보면 면천읍성 안의 마을을 화정리()라 했는데, 화정리는 이 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이 차고 좋은 샘을 ‘옷샘’이라 한다. 그 연유는 옻나무의 독이 맹독이어서 옻나무를 접촉하면 피부에 심한 염증이 생기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주 차갑고 좋은 샘물로 목욕을 했어야 했기에 물이 좋고 찬 샘을 ‘옷샘’이라 했던 것이다. 옷샘으로 불리는 것을 한자로 음사()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글자를 쓰기 위하여 옷샘 대신, 꽃샘이란 뜻의 ‘화정’으로 표기한 것이다.

 

복지겸의 말년 행적은 찾을 길이 없고, 그 죽음 또한 안개 속이다. 그런데, 1988년 당진 문화원에서 펴낸 『당()나루의 맥락』(인물 편)에 복지겸의 묘소가 순성면() 양유리()에 있다면서, 사진까지 실려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복지겸의 묘소라고 소개한 사진은, 복지겸의 후손 복수지()의 묘소임이 밝혀졌다. 그 남쪽으로 조금 올라간 위치에 단()을 설치하고 ‘고려 개국공신 대장군 태사/무공공 혜성 부원군 신위(/ )’라 새긴 비석이 서 있는데, 묘는 광주() 직동()에 있었는데 실전되었다고 새겨져 있으며, 세운 연대는 단기() 4280년 5월이다. 서기로 환산하면 1947년이 된다. 면천 복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면천 복씨 천백 년사』에 보아도, 왜 묘소가 광주에 있게 되었는지는 문중에서도 모르고 있다.
결국 제단()을 설치했던 곳에 1991년 11월, 비록 허묘()이기는 하지만, 묘를 훌륭하게 정비하고, 석물()도 세워서 번듯한 묘역()이 조성되었다. 묘역 아래에는 2008년에 사당인 무공사()까지 세워서, 왕릉 못지않은 위용을 갖추었다. 고려 개국공신 무공() 복지겸은 천여 년의 방황을 끝내고 고향땅에 편안히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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