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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 태조 왕건의 정책

by 무님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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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은 왕건은 혼인 정책이나 사성 정책 등 호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다른 한편 사심관 제도나 기인 제도를 통해 호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혼인 정책은 왕위 계승의 다툼으로 이어져 이후에 많은 혼란을 불러오게 된다.

 

또한 관제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 집권기의 고려 관제는 태봉의 관제를 축으로 하여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고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스스로 치안을 담당하는 과도기적 형태였다. 태봉의 관제는 최고관부로서 광평성을 두고 재상 광치나(고려 때의 시중) 휘하에 7부 5성 2단을 설치하여 국사를 각각 분담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제를 정비하기 위해 왕건은 태봉의 관제와 군제를 기본으로 중앙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호족 자치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에게 호장, 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도록 했다. 

 

 

1. 호족 통합 정책 :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호족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하였습니다.

* 혼인 정책 : 각 지역에 힘이 센 호족의 딸과 결혼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 사성 정책 : 호족들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었으며 성씨를 내려 주었습니다.
* 사심관 제도 : 호족을 사심관으로 삼아 그들의 출신 지역을 통제하도록 하였습니다.
* 기인 제도 :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자제를 인질로 삼아 중앙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2. 민족 통합 정책 : 신라 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나 백제 출신, 발해의 왕자를 포함한 유민들까지 적극 받아들여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며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왕건은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 정책을 실시하였다. 숭불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에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헤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그해 12월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3.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 : 백성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원칙에 따라 세금을 거두었고, 호족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감세조치 - 조세를 10분의 1로 감세

빈민구제 - 흑장을 설치

 

4. 북진 정책 : 서경(평양)을 중시하였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북쪽 지방에 성을 쌓고 군대를 머무르게 하였으며, 점차 영토를 넓혀 나갔습니다.

 

 

 

왕건은 943년 계묘년 4월 병석에 눕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왕건은 측근 세력인 박술희를 불러 ' 훈요십조 '를 전하다.

 

< 훈요십조 >는 왕이 지쳐야 할 도리를 적은 것으로 완건의 후대 왕들에게 내린 일종의 왕실헌장이라 할 수 있다.

 

< 훈요십조 >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세쩨,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넷째,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다섯째, 서경(평양)에 1백 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일곱째,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여덟째, 차령산백 이남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아홉째,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왕건의 이 같은 '훈요십조'는 고려왕조의 통치이념과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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