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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 2대 혜종의 가족관계 와 순릉

by 무님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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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혜종의 가족관계도

 

혜종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애이주 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와 혼인하였으며 94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호족으로 아버지 임희가 병부령, 즉 고려의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왕후의 친척들도 군부에 속해 있었다.
시아버지 태조는 의화왕후를 혜종이 정윤으로 임명됐을 때 같이 정윤비로 봉했다. 태조가 병부령의 딸을 혜종과 결혼시킨 건 권력이 약한 혜종이 군부와 결혼으로 연합하기 바랬길 때문.
아들로 흥화군(興化君), 흥화낭군(興化郎君)이라고도 불리는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있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군호로 "흥화궁(興化宮)을 하사받은 가신(家臣)" 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당시 고려는 유교적 풍속이 그리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딸 경화궁부인은 고려사 왕규 열전에선 장공주(長公主)라는 작위로 등장하며, 작은아버지가 되는 광종에게 시집을 갔다. 혜종으로서는 광종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딸을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시도한 셈. 다만 대목왕후와는 달리 정식 왕후가 되진 못했는데, 아마 혜종의 이른 붕어에 따른 세력의 위축과 광종 연간에 남매인 흥화군이 처형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소생으로는 흥화군, 경화궁부인, 진헌공주 등이 있다. 생몰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사망 후에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는 혜종을 지지했던 개국공신인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고려사 기록으로 딸이 셋 있는데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후광주원부인이다.왕규가 광주, 현 대한민국 경기도 출신 호족이기 때문에 세 딸의 관저도 광주원이라 한 것이다. 이는 청주원,명복궁과 같다. 혜종은 자신의 지지자인 왕규와 결혼 동맹을 통해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자 했다. 정종 때 왕규가 실각했을 때 같이 몰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주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류의 딸로 두 사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김긍률은 고려사 기록으로 딸이 둘 있는데 각각 청주원부인, 청주남원부인이다. 관저명은 자신의 본관(거점지)을 따 왔다. 혜종은 약한 자신의 세를 불리기 위해 당시 충청도에서 큰 세력을 구축한 김긍률과 연합하고자 했다. 광종 때 김긍률이 실각했을 때 같이 몰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궁인 애이주는 경주 사람이며 대간 연예의 딸이다. 소생으로는 태자 제와 명혜부인이 있다.

옛 왕조의 수도인 경주 출신 궁인이다. 아버지는 대간(大干) 관등을 가진 연예. 혜종이 나름 경주에 연을 만들려 한 모양이다. 하지만 관계를 만든 대간 연예나 궁인 애이주가 성씨가 없는걸 봐선 크게 성공하진 못한듯?
궁인은 고려사에 이름이 기록되있는 몇 안되는 여성이다. 자신보다 세력이 월등하게 큰 후광주원부인, 청주원부인도 없는 자식을 둘이나 가진 걸 보면 혜종과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듯 하다.
아들로 태자(太子) 왕제가 있었는데 고려사엔 그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과연 본인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건지 아버지 혜종의 죽음 후 숙부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만든건지는 불명.
왕제는 태자 작위가 있는데 딱히 큰 의미는 없다. 고려 초기 당시 웬만한 왕자는 다 태자 작위를 가졌다. 당시 왕위 후계자의 작위는 아버지 혜종이 봉해졌던 정윤(正胤). 딸로 명혜부인(明惠夫人)이 있으나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혜종의 승하 와 능

 

고려 혜종의 순릉

 

945년 10월 23일, 고려 본궐의 편전 중광전(重光殿)에서 붕어하였다.
고려사든 고려사절요든 혜종이 공인한 후계자를 언급하지 않는다. 혜종이 붕어한 바로 그 날, 이복아우 왕요(王堯)가 군신(郡臣)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잇게 된다.
혜종의 아들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아내가 되었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궁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을 두지 못했기에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고 만다.

 

혜종의 휘인 무(武)는 고려 내내 피휘되었는데, 모든 武라는 한자는 범 호(虎)로 대체되었다. 즉, 고려 시대에 무신(武臣)은 호신(虎臣)이라고 불렸고, 삼국사기에서도 문무왕(文武王)이 문호왕(文虎王)으로 개명당한 채 등장하였다. 모든 관리를 지칭하는 단어인 문무양반(文武兩班)도 문호양반(文虎兩班), 무관직을 통칭하는 무반(武班)도 호반(虎班)으로 바뀌었다. 이 피휘는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혜종의 신위를 불천지주에서 내림으로서 비로소 해제된다. 무(武)로써 일어난 조선 왕조로서는 전조(前朝)인 고려 왕조의 무(武)를 상징하는 왕으로 여겨지며 무(武)라는 글자를 독점한 혜종의 존재가 불편했을 것이다. 비록 피휘는 해제되지만, 이러한 관습에 따라 武 자가 계속 '호반 武'로 불리게 되었고, 현대에도 武와 虎가 서로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다. 즉 혜종은 살아 생전에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불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정작 사후에는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
다만 별무반의 경우에서 武자를 사용하였는데 武자는 虎으로 대체되었다는 통설에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중, 후기로 갈수록 선대 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 규정이 느슨해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무신정변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국역 고려사에서 무반(武班) 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총 50여개의 기사가 검색되는데 해당 글자가 검색되는 첫 시작이 의종 때의 기사로 주로 고려 중, 후기에 많이 검색된다. 의종 때에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이어지는 원나라의 침입 등 이로 인한 고려 왕실의 권위 하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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