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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단종, 세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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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승 - 조선전기 중추원부사, 의주목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창녕(). 호는 적곡(). 할아버지는 개성유후() 성석용()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 1440년(세종 22)에 경상도병마절제사를 거쳐, 1446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0년(문종 즉위)에 정조사(使) 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같은 해 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이 되었다.

세조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즉위하자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질() 등 집현전학사(殿)들과 유응부()·박쟁() 등의 무신을 포섭하여 배후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조종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해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벌일 때에 거사하기로 정하였다. 동지중지추원사 유응부와 당상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 뒤에 별운검()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는 명을 내려 거사는 중지되었다. 이에 뒷날 관가(: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 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배반, 세조에게 밀고하였다.

그 결과 아들 성삼문을 비롯한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잡혀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이 때 아들 성삼문·성삼빙()·성삼고()·성삼성()과, 손자 셋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후사가 끊겼다.

그 뒤 1784년(정조 8)에 판서 엄숙()의 상소로 신원(: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오늘날 성승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는 것은 당시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명 높은 성삼문의 아버지였음을 생각할 때, 문무를 겸비한 재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묘는 홍주() 노은동()에 있다.

일설에 노량진 사육신 묘역 안에 일찍이 ‘(성씨의 묘)’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세워진 두개의 묘가 있어, 그 한기는 성승의 묘이고 다른 한기는 성삼문의 묘라는 구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삼문의 묘밖에 없다. 장릉(: 단종의 묘) 충신단()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2. 송현수 - 조선전기 풍저창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여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송복원()이며, 단종의 장인이다.

1454년(단종 2) 풍저창부사(使)로 있을 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에 봉해졌고, 곧 지돈녕부사()를 제수받았으며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한 뒤 윤대(: 관원들이 왕과 대좌하여 응대하기도 하고 또 정사의 잘잘못을 아뢰는 일) 때에 상왕의 보필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처벌요구가 있었지만 세조의 두둔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이듬해 금성대군() 이유()와 순흥부사 이보흠()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자, 의금부에서는 그 역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 하여 모역죄로 능지처사()를 주장하였고 결국 추국()을 받게 되었다. 추국의 결과 장() 100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에 속하게 되었다가 얼마 후 종친과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교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었다.

그 뒤 아들 송거()가 과거를 보려 하자 대간의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조카인 송영()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숙종 때 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정조 때인 1791년(정조 15) 2월에 정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양정 - ?∼1466(세조 12).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청주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하지 않다. 무예가 뛰어난 무인으로서 내금위()의 무사로 발탁되었으나, 유명하게 된 것은 단종대에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면서부터였다. 당시에 수양대군은 상당한 수의 무사들을 불러모았는데, 양정도 한명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수양대군이 당시의 집정대신이며 반대파였던 김종서()·황보 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일에 관여한 공로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에 봉하여졌다.

이 후 공조판서·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판경성부사를 거쳐, 1461년(세조 7)에는 함길도·평안도의 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양정은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지대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466년에 중앙에 소환되어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왕위를 선위()하라고 세조에게 진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당시의 사관은 이러한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양정이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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