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종교로는 서학, 동학, 예언사상이 있다. 서학은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합친 것으로 조선 사회 안으로 잘 녹아 들지는 못했다. 서학에 맞서 최제우가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등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했고 조선 말기에는 많은 예언 사상이 쏟아져 나왔다.
세도 정치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기성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종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외래 종교인 천주교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서양 종교인 천주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시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등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해치고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았다.
바로 이러한 때, 경주의 몰락한 양반인 최제우가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하여 1860년에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불(佛)·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상들로는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포덕문)을 내기 위해서도 천명(天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겨 당시의 여러 사상들을 정리·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유(儒)·불(佛)·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경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적 특징을 지닌다.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하며,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로 보았는데,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동학이 지향한 세계는 극락이나 천당과 같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실현되는 동귀일체의 공동체이다. 동학에 입도하여 조화의 이치를 깨닫는 것도 “그 날부터 군자가 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될 것이니 지상 신선 네가 아니냐”(포덕문)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천상’이 아니라 ‘지상’을 지향한 일임을 강조한다.
동학은 이와 같이 각자위심에서 비롯된 사회적 혼란에서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성을 담고 있다. 동학은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기반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포덕천하(布德天下)’를 내세우고 당시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현세지향적인 교리는 동학이 19세기의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서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성리학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구실을 맡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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