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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명종, 을사사화가 일어나다

by 무님 2020.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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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는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 일파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을 말함.)과 김안로()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채무택()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 : 중종의 제2계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 :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간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항·채무택도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정유삼흉()이라 한다.

김안로가 실각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 :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윤원형()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이 시작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면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대윤인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에 유배되었고 대윤이 정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8남 )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의 무고로 이휘()·나숙()·나식()·정희등()·박광우()·곽순()·이중열()·이문건()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양재역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1498년(연산군 4)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다.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약해졌으나, 후에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림파는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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