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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명종실록

by 무님 2020.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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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은 조선 제 13대 왕 명종의 재위기간인 1545년7월에서 1567년 6월인 21년 11개월간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명종대왕>이며, 모두 34권 34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명종실록>의 편찬은 선조 원년 8월 20일에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이 춘추관에 나와 실록 편찬 인원을 선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명종실록> 권말에 부기된 전후 편찬광은 감관사- 홍섬, 지관사- 오겸,이황, 이탁, 송기수,김개, 박충원, 정종영, 임열, 송순, 동지관사- 박순, 김귀영, 이탁, 이문형, 이영현, 강사상, 송찬, 윤의중, 박응남, 백인걸, 편수관- 이제민, 이산해, 안자유, 김기문, 민기문, 권벽, 유감, 신담, 황정욱, 양희, 신희남, 이담, 이기, 유희춘 등이다.

명종의 시호는 공헌, 존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 묘호는 명종, 능호는 강릉으로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명종실록>의 내용

명종의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중종과 계비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은 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형원일파 임령 소윤와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 일파 일명 대윤는 중종 때부터 갈등을 벌였는데, 1545년 명종이 제 13대 왕으로 즉위하자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을 숙청하고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명종 2년에는 '여주가 집권하고 간ㄴ신 이기가 정권을 농단한다.'는 익명서가 양재역에 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고 그 다음해에는 윤임의 사위 이홍윤 형제의 역모 사건인 충주옥사 등이 연이어 일어나 1백여 명의 사류가 참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임꺽정의 도적 떼가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명종 초 9년 동안에 걸친 문정왕후의 섭정 아래 윤원형 일하의 외척정치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명종 6년 6월에 승 보우는 판선종사, 도대선사로서 봉은사 주지가 되어고, 승 수진은 판교종사, 도대사로 봉선사 주지가 되었다.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곤장을 쳐서 죽였고, 윤원형도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강음에서 죽었다.

1555년 외구가 전라도에 쳐들어와서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들을 전라도 영암에서 크게 무찔렀다.

 

 

 

 

명종의 태실이야기

 

13대 임금 명종의 태실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1번지에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 121호.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면서 인종의 아우로 불교를 중흥하고, 비변사를 다시 설치했다. 또한 권문 세가의 토지를 몰수해서 재분배 했다. 명종 태실은 현존하는 조선의 역대 왕의 태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태실의 구조는 개첨석, 중동석, 팔각첨석, 난간석 등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명종의 태실

 

이곳 태실은 받침돌 위에 태를 넣은 둥근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깥에는 난간을 둘러 놓았다. 비는 3기인데, 오른쪽의 비는 태실을 만들면서 함께 세운것으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형태이다.

왼쪽의 비는 왕자 전하의 태실비로 받침돌 위에 비몸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가운데의 가장 크고 화려한 비는 주상 전하의 태실비다. 거북받침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태실 오른쪽의 비는 중종 33년(1538)에 세웠고, 왼쪽의 비는 명종 1년(1546)에 세워졌다. 가운데 비는 숙종 31년(1711)에 세운 것으로, 3기 중 가장 늦게 만든 것이다.

 

명종 태실 역시 일제강점기에 태항아리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 지면서 태실과 함께 주변 석물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75년 지역 주민들의 발의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 태실지는 산 아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명종의 태실은 마치 작은 왕릉을 연상시킨다.

태실비의 명문을 보면

아기태실비는 (前面 : 大君椿齡阿只氏胎室, 後面 : 嘉靖十七年二月二十一日卯時立)

(전면 : 대군춘령아기씨태실, 후면 : 가정십칠년이월이십일일묘시립)

가봉비 1은 (前面 : 主上殿下胎室, 後面 : 嘉靖二十五年十月日建)

(전면 : 주상전하태실, 후면 : 가정이십오년십월일건)

가봉비 2는 (前面 : 主上殿下胎室, 後面 : 嘉靖二十五年十月日建 / 後一百六十五年辛卯十月日改石)

(전면 : 주상전하 태실, 후면 : 가정이십오년십월일건 / 후일백육십오년신묘십월일개석)

으로, 아기 태실의 조성은 중종 33년에 이루어지고 태실의 최초 가봉은 명종 원년(1546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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