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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선조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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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산해 - 조선시대 홍문관정자, 사헌부집의,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여수(), 호는 아계()·종남수옹(). 이장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치()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 이지번()이며, 어머니는 남수()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종사관(使)으로 명나라 조사(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이 되어 서인 윤두수()·윤근수()·윤현()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 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임인()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듬 해 정철()이 건저(: 세자 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아들 이경전()을 시켜 김공량(: 의 오빠)에게 정철이 인빈과 신성군()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물의를 빚었으며, 아들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시켜 강계로 유배시켰다. 한편 이와 관련해 호조판서 윤두수, 우찬성 윤근수와 백유성()·유공진()·이춘영()·황혁() 등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보내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백의()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에 중도부처()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정인홍()·홍여순()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으로 환배(: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와 안강의 이언적묘비()를 썼다. 이이()·정철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이다.

 

 

이산해

 

 

2. 이억기 - 1561(명종 16)∼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경수(). 아버지는 이연손()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내승()이 되고, 그 뒤 무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합세해 당항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 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돕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자, 이항복()·김명원() 등 조정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적극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으로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칠천량해전()에서 패해 원균·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공적은 이순신·원균 등에 못지 않았으나, 1592년 5월의 옥포()·사천()·당포() 등지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관계로,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 때 선무공신() 2등으로 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으로 봉해졌다. 1600년여수의 충민사()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이다.

 

 

3. 이일 - 조선시대 지중추부사, 비변사당상, 훈련원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용인(). 자는 중경().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해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 16) 전라좌수사·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이탕개()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鹿)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을 소탕해 가옥 200여 동()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정언신() 등과 변방의 군비 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해 황해·평안도로 피하였다. 이 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에서 왜적 80여 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도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해 용서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 유지에 힘썼다. 또한 충청도에서 송유진()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장양()이다.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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