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조선이 개국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또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한 여인이다. 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여 년 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정희왕후 윤씨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시호는 정희(貞熹), 생전의 존호는 자성(慈聖)이다. 세종(世宗) 때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윤번(尹璠)의 딸이며, 1418년(태종 18) 당시 청주판관(淸州判官)으로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인 홍천(洪川) 관아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낸 이문화(李文和)의 딸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원래 왕실과 혼담이 오가던 것은 그녀의 언니였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자녀들의 결혼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대군과 공주의 결혼에도 정식 간택 절차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관여하여 훌륭한 배필을 맞아주려고 노력했다. 윤번의 집 큰 딸을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배필로 점찍고 궁중의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파견한 세종은, 큰딸보다 둘째 딸의 자태가 더 비범하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둘째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조선 7대왕이 되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이다.
1428년 11세의 나이에 한 살 연상의 수양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왕실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는 문종이 이미 세자의 자리를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군 즉, 왕자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왕비는 거의 생각할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녀는 수양대군의 아내가 되면서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미리 정보가 누설되어 거병을 망설이는 세조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내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계유년에 세조께서 기회를 잡아 정난하였으며, 태후도 계책을 같이 해서 임금을 도와 큰 일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한다’는 의미인 정난(靖難)으로 미화시켜 거병했다. 그러나 이 계유정난은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정희왕후는 남편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늘 걱정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결심이 굳어진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심지어는 정난을 일으키기로 한 아침,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하여 손수 갑옷을 입혀 말 위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 계유정난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보내 죽임으로써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자성왕태비(慈聖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9년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정희왕후는 당시 4살이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1466~1525)을 대신해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잘산군(乽山君) 이혈(李娎)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새로 왕위에 오른 성종(成宗)도 당시 1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1469년부터 1476년(성종 7) 2월 8일(음력 1월 13일)까지 약 8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조정은 비교적 평안히 유지되었다.
정희왕후는 1469년부터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의 최고정책결정권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종친 정리작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관리 등용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비록 단종은 복권하지 않았지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를 신원하여 단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 정도는 상쇄하려 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정책면에서는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을 강화시켰다. 불교의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사찰을 폐지하였으며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했다. 또한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엄단하고 농업과 잠업을 육성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를 도운 것은 세조의 근신이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었다. 이들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엄청나게 큰 정치, 경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훗날 새롭게 정계에 들어오게 되는 사림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어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단성있고 노련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조선의 왕권은 안정을 되찾았고 사회는 정돈되어 갔다. 이것은 이후 성종의 친정기에 문물제도가 완성되는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녀는 세조가 거둥(擧動)하던 온양온천에 자주 내려가 있었고 죽음도 온양에서 맞이하였다. 1483년 3월 30일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수가 66세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조선전기 제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 있다. 시호는 자성흠인경덕선렬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神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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