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조선 세종 때 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한 관료이다. 세종 때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할아버지는 지평을 지낸 김태영이고, 아버지는 도총제 김추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우정언·이조정랑 등을 지내고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시작으로, 죽산현감을 거쳐 1418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426년 이조정랑이 되어 전라도의 왜인 포획 상황을 조사 · 보고하였고, 1427년 황해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33년(세종 15) 12월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1434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이후 도절제사가 되어 육진(六鎭)을 개척,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는 공을 세웠다.
김종서가 주도해서 개척한 6진이라 함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을 말한다. 이곳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왕조 건설의 모태가 되었던 이른바 ‘흥왕(興王)의 땅’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땅이었다. 특히 세종의 회복 의지는 강하였다.
김종서가 이곳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에 제수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여진족의 일파인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 : 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 동맹가티무르(童猛哥帖木兒)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여진족의 내분을 이용해 북방 개척에 착수, 그 책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한 것이었다. 함길도에서 생활하던 김종서는, 화살이 책상에 날아왔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누차 독약을 넣었으나 죽지 않은 큰 호랑이(大虎) 그 자체였다. 김종서의 주도로 이곳에 진을 설치하는 한편 남방 지역의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6진의 설치는 우리나라 북쪽 경계가 두만강 연안에까지 미치게 되는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1445년 예조판서로 도순찰사가 되어 충청 · 전라 · 경상 3도에 파견, 목장지를 조사 · 보고하였으며, 1446년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1451년 우의정에 올랐다. 김종서는 또한 문종 대에는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조선조 건국 이후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미 태조 대부터 시작되어 1395년 [고려국사]가 편찬된 바 있고 이것이 이후 약 5차례의 개수 과정을 거쳐 1451년 [고려사]로 완성되었다. 이때 김종서는 [고려사]가 주제별로 편찬되어 열람에 불편하니 일자별로 기록한 사서를 편찬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5개월 만에 [고려사절요] 35권을 완성해 올렸다.
고려 왕조 역대의 역사에서 정치에 귀감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후대 임금들이 정치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므로 상당히 교훈적인 역사책이다. 아울러 편찬 주체가 [고려사]는 국왕이 중심이 된 데 비해 [고려사절요]는 신하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신하 중심의 사서라고 평해지기도 한다.
1452년에는 좌의정이 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다.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문종이 덧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권람∙홍윤성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한 타도의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 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여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한순간에 두만강의 벌판을 호령했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서의 묘가 있다. 묘역은 약 70㎡로, 담장이 있고 3문으로 되어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무덤 앞에 있는 오래된 묘비는 1748년(영조 24)에 세운 것이고, 1963년 새로 건립한 묘비는 높이 3m, 너비 5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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