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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by 무님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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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5대 왕 문종의 적장녀. 단종의 친누이이며 정종()과 혼인하였다. 본관은 전주(). 문종의 1남 2녀 중 장녀이자 제6대 왕 단종의 친누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다. 1450년(세종 32) 본관이 해주()로 참판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과 혼인하였고 정종은 영양위()에 봉해졌다.

 

경혜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문종은 즉위 전이었고, 어머니 권씨는 세자의 후궁으로 품계는 종3품 양원(良媛)이었기 때문에 '현주'로 불리게 되었다. 위로 언니가 있었으나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1433년에 죽었다. 어머니 양원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경혜공주는 현주에서 군주로 승격되고,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열네 살 때부터 경혜공주의 삶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도 세종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의 혼사를 서둘렀다. 만약 세종이 사망한다면 삼년상 동안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 동안은 혼인할 수 없었다. 삼년상의 기간은 36개월이 아니라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었다. 윤달이 있으면 25개월보다 길어졌다. 왕실의 식구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를 경우 경혜공주는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이었다. 한성부윤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 2. 6.)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살림집을 장만하기 전인 같은 해 2월 17일(1450. 3. 30.) 세종이 그만 눈을 감았다. 결혼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이때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였다. 아버지가 왕이 된 뒤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불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경혜공주의 동생 단종이 즉위했다. 단종은 자주 향교동 경혜공주의 집을 찾았고 계유정난이 있던 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졌다. 공주가 병이 나자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라고 일렀고 세조도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며 정종을 잠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사간원의 상소로 정종은 공주의 병이 낫자 다시 유배되었다. 공주는 이때 정종의 유배지인 수원으로 향했고 나중에 통진(通津)을 거쳐 전라도 광주(光州)까지 따라갔다. 이후 정종은 승려 성탄 등과 결탁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였다. 당시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경혜공주 또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그를 점입가경의 파멸로 몰아세우던 운명의 신은, 벼랑 끝에서 갑작스레 상황을 종결지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수양대군(당시는 임금)이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부른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곳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했다. 또한 지난 2012년 7월 24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해주 정씨 대종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는데, 공주 자신이 죽기 사흘 전인 성종5년(1474년) 음력 12월 27일에 제작된 것으로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예종에 이르러서는 경혜공주 내외의 아들 정미수를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1473년(성종4) 12월 30일 졸하였으며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 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하사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경혜공주는 죽기 사흘 전에 외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분재기에서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며,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먼저 정선방(貞善坊)에 하사받은 집과 통진(지금의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전답을 준다"고 적고, 정선방에 있는 가사에 대해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자손에게 전하며 오래 지니고 살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딸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의 묘가 있다. 대자골마을에 경혜공주의 묘와 정종의 묘가 각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봉분은 경혜공주의 것만 남아 있다. 묘갈은 높이 122cm, 폭 43cm이며 앞면에 '조선국 경혜공주지묘( )'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심하게 훼손되어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봉분 주변으로 상석, 혼유석, 묘비,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 등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문인석은 높이 176cm로 조선시대 초기 양식을 보여준다. 정종의 묘는 경혜공주 묘 오른쪽에 있으며 봉분 없이 묘비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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