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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연산군 ~ 선조시대 인물 - 퇴계이황

by 무님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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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다. 호는 ‘퇴계’이다. 평생 동안 학문 연구에 힘써 성리학(주자학)을 체계화했고, 도산 서당을 세워 제자를 길러 내는 데 힘썼다.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의 대학자로서 쌍벽을 이루었으며, 붕당 가운데 동인이 그를 시조로 떠받들었다.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의 집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모친은 춘천 박씨인 박치의 딸로, 전처인 의성 김씨와 사별한 후 아버지 이식이 들인 후처였다. 

 

퇴계 이황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독서를 즐기는 모범생으로 자랐고, 열두 살 때 《논어》를 익힐 정도로 학문 수준도 높았다. 6살때 천자문으로 한문에 길을 들였고, 12살에 논어로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며 다양한 경과 시를 접했는데, 특히 19살 주희의 성리대전을 독파하고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히 알게 되었다"는 말을 뱉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깊어졌다. 20살에 주역을 공부하다가 공부중독이라도 된건지 몸을 엄청 망가뜨리며 이후에도 건강이 썩 안좋아졌다고 한다. 이황의 가정사는 행복하다고 말할수는 없었다. 21살 허씨부인과 결혼하지만 이황이 27이 되어 둘째 아들을 낳고서 죽는 불행이 닥쳤다. 이황은 사위된 바를 다하며 혼자 남은 장모를 마지막까지 챙겼다고 한다.
이후 30살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한다. 안타깝게도 권씨의 가정사 역시 정치에 크게 희생당한 삶이였는데 권씨의 할아버지 권주(權柱)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사람이라 갑자사화로 교살당했으며 할머니는 관노가 되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했는데, 이 과정속에서 어린 허씨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권질은 이황의 인격을 알아보고 유배되었을 때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라며 자신의 딸을 보살펴달라 부탁한 것.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사가 어려운 아내 대신 집안살림을 하면서 아내를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보살피는 지극정성을 보였다. [출처] 그러나 결구 허씨부인은 이황이 46살이 될때 아이를 낳다가 죽는 비극을 맞이한다.
대학자인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과거 시험에서 고배를 많이 마셨다.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 2등으로 합격한 후, 이듬해 진사시험에 2등으로 오랜 시간동안 고시 낭인의 시간을 거친 이황은 34살이 된 1534년 과거시험 문과 초시 2등으로 급제했다. 어린시절 덜컥 과거에 붙어버리고 9번이나 과거를 씹어먹는 천재 이이와 다르게 인간적인 코스를 거친 편. 이후 43살까지 종3품 성균과 대사성까지 올랐지만 정치 난맥상에 많이 엮이면서 이후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귀경을 반복하게 된다. 45살에 을사사화에 엮이며 파직당하다가 오래지않아 복직, 50살에 형 이해가 사화에 휘말리며 유배가는 길에 죽는다. 모진 정난과 가정사를 맞은 이황은 46살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등의 외직을 다니며, 풍기군수 재직시절 주세붕에게 건의해 최초로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짓게 된다. 50이 되며 확고하게 귀향을 결심하고 60살 고향에 도산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이황은 성리학(주자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것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법칙인 ‘리’를 ‘기’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은 주리론을 계승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영남학파는 중부 지방의 기호학파와 경쟁하며 주리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기호학파는 이황과 함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이이의 주기론을 계승한 세력이었다.

한편, 이황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 1570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의 문집이 일본에도 전해져 당시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의 묘

 

이황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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