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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의 선택과 버림을 받은 조광조

by 무님 202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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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조선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 호는 정암(). 한성 출생. 개국공신 조온()의 5대 손이며, 조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충손()이고,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민의()의 딸이다.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했으며,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 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이라거나 혹은 ‘화태()’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앞선 연산군 대 국왕을 비롯한 집권 세력 내에서 자행된 갖가지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때 사림들이 정치에 재진출하며 조정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사림이란 후일 율곡 이이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으로 옛날의 도를 사모하고, 몸으로는 유자의 행동에 힘쓰며 입으로는 정당한 말을 하면서 공론을 가지는 자”들을 말한다. 조광조는 바로 이런 성향의 사림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한 후, 1515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벼슬이 높아갈수록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음먹고 있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도학정치란 공자와 맹자가 정립한 정치이며, 그 원류는 유학에서 이상시대로 알려진 요순시대의 정치 그것이었다.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했고 도학()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를 지키게 되어 상례()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느며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를 위해 반정했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를 먼저 하고 있으므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 등은 원종공신()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 중 홍경주()·남곤()·심정()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 호조판서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고는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조광조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원형의 봉분이다. 봉분 중앙에 묘표와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로 문인석·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으로 된 묘표()는 봉분 중앙에 새워져 있다. 장방형 비좌의 4면에는 국화문 및 안상과 상부에 복련문이 수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백색 대리석으로 된 비신 앞면에 종5열로 묘주인 조광조의 주요 관직과 부인인 정경부인 이씨가 명기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묘표와 같은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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