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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인종 실록

by 무님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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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실록>은 조선왕조 제12대 왕이었던 인종의 원년부터 재위기간인 1544년11월에서 1545년7월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거이다. 정식 이름은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실록>이며, 모두 2권 1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인종의 즉위년인 1543년 11월 16일에서 12월 말까지의 기사는 <중종실록> 제 105권에 합편되어 있다.

인종은 재위기간이 9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종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지 못하였고, 명종이 즉위한 뒤에도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착수하지 못하였다.

명종 원년인 1646년 가을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을 동시에 쳔찬하게 되었다. 이때 우의정 정순붕이 실록청 총재관, 대제학 신광한 등이 실록청 당상광에 임명되어 편찬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명종 2년인 1547년 12월에 우의정 정순붕이 총재관을 사직하고 좌의정 이기가 대신 실록청의 총재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종실록>의 편찬을 마치고 <인종실록>을 편찬 할 때는 좌의정 심연원이 실무를 주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묘호는 인조, 시호는 영정, 존호는 헌문의무장숙흠효이며, 능호는 효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인종실록>의 내용

인종의 휘는 호이며, 자는 천윤이다.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 태아난 큰아들이다. 1520년인 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중종 39년인 1545년 7월1일에 세상을 떠났으으로 재위기간이 9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재위기간이 짧아 치적은 기록할 만한 것이 적다. 본 실록에 나타난 행적과 즉위 이후의 치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종은 자질이 뛰어나 3세 때에 글을 배웠고, 8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행동이 바르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원년 3월에

성균과 진사 박근 등의 상소를 필두로 대간, 시종시, 경연관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조광조의 복직을 청하였다. 그때마다 인종은 결정을 미루다가 병환이 위중하게 되자 대신들에게 유교하여 그를 복직시키고, 기묘사화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복직시켰다. 인종은 중종의 초상 때 6일 동안 식음을 전페하고 5개월 동안 고하며 죽만 먹었고 소금과 장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병세가 더하였으나 대신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1545년 6월 29일 대신들에게 아우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전위하고 잘 보필힐 것을 부탁하고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인자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인종이란 묘호를 얻었다.

 

 

 

 

인종의 태실이야기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발굴 조사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 12대 임금 인종의 태실은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에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50호

인종태실은 중종 16년(1521)에 조성 되었다. 이후 인종이 죽고 난 후 명종 1년에 가봉 공사가 있었고, 숙종 37년(1711년)에는 수개가 있었다. 1928년 일본 통치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을 내세워, 54기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봉했다. 이때 옮겨진 것은 인종의 태항아리와 지석 1점등이다. 가봉비를 비롯한 석물들은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1999년 경북문화재연구원은 복원 정비를 위한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해 개첨석, 중동석, 난간석 등 석물들을 수습했고, 태실복원도를 작성했다. 이를 토대로 인종의 태실은 복원됐다.

 

 

인종 태실 태호석함 상부 석물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복원된 태실은 가봉비로 귀부는 남아 있으나, 이수와 비신은 거의 파실되어 명문을 파악할 수 없다. 인종 태실은 가봉된 다른 어떤 태실보다 그 규모가 크고, 각종 석조물의 장식이 화려하며 웅장하다. 또한 조성 연대가 분명해서 태실 조성양식과 조각기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인종 태호, 태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종의 태항아리는 조선 전기 백자 태항아리의 가장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의 백자 항아리로 구성되며, 풍만하고 긴 몸체에 맑은 담청색의 유약이 곱게 발라져 있다. 어깨에는 끈을 묶기 위한 4개의 고리가 달리고, 뚜껑의 꼭지에도 역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지석은 장방형으로 대리석 재질이다. 규모는 가로 25.2cm, 세로 22.5cm, 두께 4.5cm 이고, 제작 시기는 1512년이다.

아기태실비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서삼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명문을 보면,

[黃明正德十年二月二十五日 戌時生 世子山告胎正德十六年正月十七日 午市裝]

[황명정덕십년이월이십오일 술시생 세자산고태정덕십육년정월십칠일 오시장]

으로 장태일이 중종 16년(1521년)임을 알 수 있으며 가봉은 명종 즉위년(1546)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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