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명왕후 신씨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비다.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정추진파(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하였고, 폐위되었다. 영조 때 복위되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의 조강지처였다. 진성대군이 반정에 성공하여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에 즉위하였으나, 이때부터 남편과는 생이별을 하여 평생 중종을 그리워하다 일생을 마쳤다.
신씨는 1487년 1월 연산군과 매부지간인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으며 13세에 진성대군과 혼인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반정세력이 형성되고 반정에 성공하여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왕으로 추대된 중종은 신씨를 사저에 홀로 두고 입궐하였다.
그러나 신씨에게는 남편이 왕으로 추대된 기쁨도 잠시였다. 연산군의 매부인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중종이 신씨의 왕비 책봉절차를 서두르자 반정공신들은 신씨가 언젠가는 자신들이 죽인 아버지의 복수를 할 것을 두려워하여 신씨의 왕비 책봉에 반대하였다. 신씨는 대신들의 종용을 받는 중종에게 자신은 남편을 위해서는 어느 자리에 있어도 무방하다고 오히려 위로하였다.
결국 신씨는 남편이 즉위한 지 8일 만에 폐서인이 되어 궁궐을 떠나게 되었다. 중종과 신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는 점도 작용하여 아무도 신씨를 보호해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종반정으로 인해 신씨는 남편과 친정 모두를 잃은 피해자가 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다.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온다.
중종의 임종 직전에는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조선전기 제11대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승하하자, 친정인 신가묘역(愼家墓域)에 묻혀 있었다.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면서 묘호(廟號)를 단경(端敬), 능호(陵號)를 온릉으로 하였다.
능 뒤에 곡장(曲墻 : 굽은 담장)을 두르고 능 안에 석양(石羊)·6석호(石虎) 각 2필로 호위하였으며, 병석(屛石)과 난간이 없는 원분(圓墳) 앞에 혼유석(魂遊石)을 놓고 양쪽 끝에 망주(望柱)를 세웠으며, 중앙에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을 세우고 양측에 문석(文石)과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인과 참봉(參奉) 1인을 두고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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