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며 선전내승(宣傳內乘), 동부승지,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등을 지냈다. 중종 옹립의 반정(反正)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 할아버지는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박거소(朴去踈)이고, 아버지는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박중선(朴仲善)이며, 어머니는 행호군(行護軍) 허균(許稛)의 딸이다.
무술에 뛰어나서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宣傳內乘)으로 승진,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다. 1492년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자 사헌부에서 나이도 어린데다가 무과 출신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해 서경(署經)을 보류하자, 성종이 다시 공조참의로 발령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다시 반대하자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 문제 등 시무책(時務策: 당시 해결해야할 긴급한 정책 과제)을 건의해 실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2년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대간들의 탄핵이 지나치다라고 건의해 이를 견제했으며, 이우증(李友曾)·조윤손(曺潤孫)·이순(李珣) 등을 천거해 임용시키기도 하였다.
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漕運船) 40여 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지 운송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무신 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해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瓦阜邑) 도곡1리((陶谷1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가 있다. 2000년 3월 24일 경기도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금대산에 위치하고 있다. 석물(石物)로는 묘표(墓表)·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장명등(長明燈) 각 1기(基), 망주석(望柱石) 및 문관석(文官石) 각 2기, 계체석 등이 있다. 그리고 묘역의 앞쪽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封墳) 앞의 묘표는 월두형(月頭形) 비신(碑身)과 비대(碑臺)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 51.5×14.5×130㎝, 비대 101×60×3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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