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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시대 관련 인물 - 주세붕 <소수서원>

by 무님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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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서원을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하였다. 이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아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았다

 

주세붕 영정

 

주세붕은 조선전기 풍기군수, 성균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 자는 경유(), 호는 신재()·남고()·무릉도인()·손옹(). 고려 말에 고조가 경상도 합천에 우거했으나, 아버지대에 칠원()으로 옮겨살아 칠원에서 출생(일설에는 합천에서 출생했다고 함.)하였다.

증사복시정 주상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장손()이고, 아버지는 주문보()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28세 때인 중종 17년(1522) 별시문과() 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검열()·부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 도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중종 32년(1537) 권세를 잡은 김안로()의 전횡을 피하여 노모의 봉양을 핑계삼아 외직인 곤양() 군수로 나갔지만 이듬해 파직되었다. 모친이 사망하자 모든 상제를 ≪가례 ≫에 따라 행하였으며, 뒤에 승문원 교리()·예빈시정()을 거쳐 중종 36년(1541) 풍기() 군수가 되었다.
중종 37년(1542)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의 사당 회헌사()를 세우고, 이듬해 주자()의 백록동학규(鹿)를 본받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명종 5년(1550)에는 풍기 군수 이황()의 청원으로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과 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 6년(1551)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 최충()을 제향()하였다. 뒤에 다시 대사성,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으로 사직을 청하자 동지성균관사에 체직되었고 명종 9년(1554)에 사망하여 고향인 칠원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청백리에 녹선(錄)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과 백운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지 ≫, ≪해동명신언행록 ≫, ≪심경심학도 ≫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철종 10년(1859) 후손들이 편집한 ≪무릉잡고 稿≫가 있다. 경기체가인 <태평곡 >·<도동곡 >·<엄연곡 >·<육현가 > 등과 <군자가 >·<학이가 >·<문진가 >·<욕기가 >·<춘풍가 >·<지선가 >·<효제가 >·<정양음 >·<동찰음 >·<오륜가 > 6수 등 15수의 단가를 남겼다.

 

주세붕의 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학자 주세붕의 묘소와 시도기념물이 있다. 묘소의 봉분은 원형이며, 전면 중앙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는 화관형으로 만들었는데 대석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봉분 우측에도 묘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정면의 묘비보다 훨씬 큰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역시 화관형을 하고 있으며 대석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묘비의 장식이 봉분 정면의 것보다 훨씬 화려하다.

상석 앞으로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는데, 글자를 새긴 것이 독특하다. 우측 망주석에는 '수무부모()', 좌측에는 '숙비인자()'라고 새겼다. 묘역에는 주세붕의 묘소 외에 부친 주문보(), 조카 주조()의 묘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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