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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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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수동 -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미수(), 호는 만보당(), 시호는 문경(), 본관은 안동()이다. 상락부원군() 김사형()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김적()의 아들이다. 1474년 생원시에 합격, 147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성종 때에 검열과 정자와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초에 전라 · 경상 ·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99년 예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참판과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03년 지춘추관사 겸 홍문관제학이 되고,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해 갑자사화 때 폐비윤씨의 회릉추숭()을 주장하여,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에 가자()되었다. 1505년 우찬성과 판의금부사, 이듬해 우찬성과 우의정에 올랐다. 재치가 넘쳐 연산군 폭정 때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많은 문신들에게 화를 면하게 했으며 청렴을 지켰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2등으로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영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510년 영의정에 올랐다. 『국조인물고』에서는 신용개()가 지은 비명에 이르기를 "공은 예서를 잘 쓰고 사대표주()를 쓰는 데 뛰어나서 한 때의 모든 신료들이 제일로 추대하였다."라고 하였다. 『해동명신록』과 『연려실기술』에서는 "글씨에 뛰어났고 예서를 잘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금석평』에서는 "한계순 비의 해서는 속되다."라고 하였다.

 

 

 

2. 김처선 - ?∼1505(연산군 11). 조선 중기의 환관이다.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때 귀양이 풀리고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 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을 당하였다. 성종으로부터는 전어(: 통역)에 공이 있고,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 치료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여 가자()되고 상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품계가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그 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던 중 1505년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연산군에 의해 직접 다리와 혀가 잘리고 죽음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양자인 이공신()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도 없앴다.

그리고, 조야()에 명하여 ‘(처)’ 자()와 ‘(선)’ 자()를 이름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1751년(영조 27)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3. 박종원 - 조선전기 삼봉도경차관, 선천군수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472년(성종 3) 삼봉도경차관()으로 나아가 왕의 신임을 받고 많은 포상을 받았다. 또한, 병조에서 범을 잡으려고 할 때 착호인(: 범을 잡은 사람)으로 뽑혀 많은 상을 탔다. 1478년 선천군수를 지냈으며, 1480년 훈련원부정()으로 있을 때 삼봉도 초무사(使)로 임명되자 수로를 꺼려하여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려 했다가 탄핵을 받고 김해로 유배되었다. 1482년 직첩()을 돌려받았다.

 

 

4. 성준 -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시좌(時佐),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1456년(세조 2) 사마시에 합격, 1459년 식년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1469년(예종 1) 세자시강원필선ㆍ사섬시첨정 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481년 이조참의ㆍ우부승지ㆍ좌부승지를 거쳐, 다음 해 우승지ㆍ형조참판ㆍ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484년 한성부우윤ㆍ경기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로 세자시강원좌빈객을 겸하였다. 1488년 대사헌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1490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1년 영안도절도사로 나아가 북정부원수(北征副元帥)로서 도내에 쳐들어온 야인을 정벌하였다. 1494년(성종 25)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이 되고, 1498년 우의정에 올랐다.1499년 삼수군(三水郡)에 야인들이 침범하자 서정장수(西征將帥)가 되었다.

1500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십조를 주청,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을 경계시키기 위해《국조보감》(國朝寶鑑) 읽기를 권하기도 했다. 1503년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했으나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한 죄로 직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잡혀와 교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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