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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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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희안 - 조선전기 홍문관정자, 형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우옹(), 호는 인재(). 예문관대제학 성사달()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온서직장() 성효연()이고,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성찬()이다. 어머니는 종실인 덕천군() 이후생()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했으며, 당시 성종의 숭유정책()에서 국왕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그 뒤 예빈시주부(簿)가 되었다가 관위가 누진되어, 1494년(성종 25) 교리로서 한어이문()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이 즉위해서도 문무의 요직을 거쳤다. 1499년(연산군 5)에는 군기시부정()으로서 서정도원수(西) 이계전()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501년 유구국() 사신의 내빙으로 선위사(使)가 되어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당시 사신에게 들은 유구국의 상황을 근거로 『해동제국기()』를 보완하였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 왕세자 책봉에 대한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1504년에는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양화도()의 망원정()에서 유락을 즐길 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올렸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관 말단직인 부사용()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더하고 민심 또한 더욱 흉흉해지고 있던 1506년, 박원종()과 함께 반정()을 도모, 명망가이던 유순정()을 참여시키고, 신윤무()·박영문()·홍경주()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을 옹립, 거사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에 봉해졌다. 관직은 형조판서에서 곧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숭록대부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창산부원군()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임, 반정의 뒤처리를 하였다. 거사에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며 박원종·유순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세 번째에 서기도 하였다.

한편, 중종 즉위에 명나라 고명(: 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의전제도)이 어렵게 되자, 청승습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어 실록총재관()이 되어 『연산군일기()』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509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 뒤 반정공신의 다수를 이루는 무관을 옹호하여 사풍()을 능멸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5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이다.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2. 신윤무 - 조선전기 공조판서, 좌우참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영월(). 조부는 첨지중추원사() 신영손()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신숙거()이다.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군자시부정()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성희안()·박원종() 등에게 내외정세를 세밀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을 결심하게 하고, 거사일에는 군사를 모아 임사홍()·신수근()·신수영() 등을 격살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영천군()에 봉하여졌다. 그 뒤 함경도병마절도사(使)가 되었는데, 탐오하고 군무에 소홀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구원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 때 역시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된 박영문()이 울분에 못 이겨 자주 신윤무의 집을 찾아와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많이 하였다. 신윤무는 늘 박영문에게 시기가 아니라며 타일러서 말렸으나, 이와 같은 사실을 엿들은 의정부의 노비 정막개()의 고변으로 주살되고, 두 아들 신공()·신검()은 모두 교살당하였다.

 

 

3. 어세겸 - 조선전기 병조판서, 좌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함종(). 자는 자익()이고, 호는 서천(西)이다. 목사 어연()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직제학 어변갑()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어효첨()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박은()의 딸이다. 우참찬 어세공()의 형이다.

1451년(문종 1)에 생원이 되고, 1456년(세조 2)에 동생 어세공과 동방()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정자()·봉상시녹사()를 거쳤다. 1459년에 천추사(使) 이극배()의 수행관인 이문학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문명()을 드러내 예문관대교()·봉상시직장()·성균관주부(簿)·예문관봉교() 등 요직을 거쳤다. 1461년 이조좌랑, 1464년 이조정랑에 임용되었다. 1466년에 김국광()·한계희()의 천거로, 종부시정(簿)으로 예문관직제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69년(예종 1)에는 강순()·남이()의 역모에 관한 옥사() 이후,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평안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성종이 즉위한 뒤, 경직인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예조참판에 올랐다.

1478년 겸오위도총부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아우 어세공이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어 상피법(: 친척이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는 같은 곳에서 벼슬을 서로 피하게 하던 제도)에 저촉되는 까닭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1479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으로 옮겼고,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에 건주위() 정벌 승전을 알리는 주문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오륜서()』·『국자감통지()』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귀국 후 전라도관찰사·공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다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일시에 이조참판으로 좌천되었다. 1482년에 봉조하()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한성부판윤·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8년 말에는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좌참찬·우찬성·좌찬성을 거쳐 1495년(연산군 1)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사초() 문제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소절(: 사소한 절개)에 얽매이지 않았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간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 소송의 결정)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여 내외치()에 많은 업적이 있다.

특히 성종 말에는 권근()·윤회()·변계량()·최항()의 뒤를 이어 문형(: 대제학의 별칭)을 담당하였다. 1483년 서거정()·노사신()과 함께 『연주시격()』과 『황산곡시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490년 임원준() 등과 함께 「쌍화점()」·「이상곡()」 등의 악사()를 개찬()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주례()』를 개주()하여 왕에게 올렸다. 1492년 유자광() 등과 함께, 전하는 여러 진서()의 이동()을 참작해 『진법()』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서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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