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희안 - 조선전기 홍문관정자, 형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예문관대제학 성사달(成士達)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성효연(成孝淵)이고,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성찬(成瓚)이다. 어머니는 종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했으며, 당시 성종의 숭유정책(崇儒政策)에서 국왕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그 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었다가 관위가 누진되어, 1494년(성종 25) 교리로서 한어이문(漢語吏文)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이 즉위해서도 문무의 요직을 거쳤다. 1499년(연산군 5)에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이계전(李季全)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501년 유구국(琉球國) 사신의 내빙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당시 사신에게 들은 유구국의 상황을 근거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보완하였다. 150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 왕세자 책봉에 대한 하례를 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형조참판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1504년에는 이조참판으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양화도(楊花渡)의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락을 즐길 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올렸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무관 말단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더하고 민심 또한 더욱 흉흉해지고 있던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 명망가이던 유순정(柳順汀)을 참여시키고,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홍경주(洪景舟)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 거사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거사의 주역으로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형조판서에서 곧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숭록대부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으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 반정의 뒤처리를 하였다. 거사에 앞장서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은 차례가 있다며 박원종·유순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세 번째에 서기도 하였다.
한편, 중종 즉위에 명나라 고명(誥命: 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의전제도)이 어렵게 되자,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이어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이 되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1509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그 뒤 반정공신의 다수를 이루는 무관을 옹호하여 사풍(士風)을 능멸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5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2. 신윤무 - 조선전기 공조판서, 좌우참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조부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영손(辛永孫)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贈判書) 신숙거(辛叔琚)이다.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게 내외정세를 세밀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을 결심하게 하고, 거사일에는 군사를 모아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 등을 격살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천군(寧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탐오하고 군무에 소홀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구원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 때 역시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된 박영문(朴永文)이 울분에 못 이겨 자주 신윤무의 집을 찾아와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많이 하였다. 신윤무는 늘 박영문에게 시기가 아니라며 타일러서 말렸으나, 이와 같은 사실을 엿들은 의정부의 노비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주살되고, 두 아들 신공(辛恭)·신검(辛儉)은 모두 교살당하였다.
3. 어세겸 - 조선전기 병조판서, 좌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서천(西川)이다. 목사 어연(魚淵)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직제학 어변갑(魚變甲)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박은(朴訔)의 딸이다. 우참찬 어세공(魚世恭)의 형이다.
1451년(문종 1)에 생원이 되고, 1456년(세조 2)에 동생 어세공과 동방(同榜)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쳤다. 1459년에 천추사(千秋使) 이극배(李克培)의 수행관인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문명(文名)을 드러내 예문관대교(禮文館待敎)·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 등 요직을 거쳤다. 1461년 이조좌랑, 1464년 이조정랑에 임용되었다. 1466년에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의 천거로,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예문관직제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69년(예종 1)에는 강순(康純)·남이(南怡)의 역모에 관한 옥사(獄事) 이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평안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성종이 즉위한 뒤, 경직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예조참판에 올랐다.
1478년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아우 어세공이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어 상피법(相避法: 친척이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는 같은 곳에서 벼슬을 서로 피하게 하던 제도)에 저촉되는 까닭에 임명이 취소되었다.
1479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으로 옮겼고,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에 건주위(建州衛) 정벌 승전을 알리는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오륜서(五倫書)』·『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귀국 후 전라도관찰사·공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다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일시에 이조참판으로 좌천되었다. 1482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한성부판윤·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8년 말에는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좌참찬·우찬성·좌찬성을 거쳐 1495년(연산군 1)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사초(史草) 문제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소절(小節: 사소한 절개)에 얽매이지 않았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간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 소송의 결정)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여 내외치(內外治)에 많은 업적이 있다.
특히 성종 말에는 권근(權近)·윤회(尹淮)·변계량(卞季良)·최항(崔恒)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 대제학의 별칭)을 담당하였다. 1483년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490년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주례(周禮)』를 개주(改註)하여 왕에게 올렸다. 1492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전하는 여러 진서(陣書)의 이동(異同)을 참작해 『진법(陣法)』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서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인물 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0.10 |
---|---|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10.05 |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09.24 |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0) | 2020.09.21 |
예종, 성종 시대 관련 인물 (0) | 2020.09.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