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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예성, 성종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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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성군 - 조선전기 사도병마도총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영의정 등을 역임한 왕족. 종실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청().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 이구()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에, 이어 구성윤()으로 봉해졌다. 1463년에 구성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기 때문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5월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27세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使)에 임명되어 이를 토평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훈봉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어 일품종실()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5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2등에 훈봉되었다. 이듬해에 아버지 임영대군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 직임을 내어놓았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로 귀양갔으나, 왕족이므로 배려를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으며 곡식을 지급 받았다. 귀양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 김수항()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 등의 난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이다.

 

 

2. 영순군 -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 1444년 6월 ~ 1470년 3월 28일)는 조선 왕족 종실이다.

영순군[1444~1470]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광평대군을 여의었다. 세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5세까지 세자와 같이 공부하도록 궁중에서 길렀으며, 8세가 되자 특별히 가덕대부() 영순군()에 봉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문무에 통달하니 세조는 항상 옆에 두고 모든 왕명의 출납을 일임하였다. 1466년(세조 12) 등준시()에 5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5월 이시애()의 난 때에는 세조의 평정계획에 적극 참여한 공로로 적개공신()에 책훈되고, 현록대부(祿)에 올랐다. 1468년 2월 세조가 온양에서 베푼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미곡 50석을 하사받았다. 1469년(예종 1)에 일어난 남이()의 옥에 공을 세워 익대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월산대군

 

 

3. 월산대군 -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형인 왕족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 추존왕 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 한씨()이다. 성종의 형으로, 평양군() 박중선()의 사위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祿)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어 전지()·노비·구사() 등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좌리공신의 책봉은 월산대군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왕위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조처였다.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 이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어떤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곧,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종실의 대표자격이며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던 구성군() 이준()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권신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조치의 하나로 좌리공신을 책봉하였다.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왕위를 놓치고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이로 인해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후 서호(西)의 경치 좋은 양화도()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을 개축해 망원정()이라 하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 뒤에 소혜왕후로 추존)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두 아들이 있었다.

1473년 이후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해 덕종의 맏아들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덕종이 종묘에 부묘되면서 월산대군의 위치는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으며,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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