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로

by 무님 2020. 11. 9.
728x90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의 원인은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일이다.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에 기항하고 있던 중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Meadows and Company)와 용선계약을 체결해, 계약기간 중 셔먼호는 영국 상사에 위탁되어 있었다. 셔먼호는 80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갖추고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메도즈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 )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셔먼호의 승무원 구성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등 미국인 3명, 통역 담당 토머스,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등 영국인 2명, 그리고 기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으로 총 24명이었다.

이 중에서 셔먼호 승조원 중의 주역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 1865년 9~12월 황해도 연안 섬에서 선교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 때마침 셔먼호 통역으로 채용되어 대망의 조선행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셔먼호는 백령도·초도()·곶석도()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러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유원지의()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셔먼호 승조원들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군 이현익()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 신미양요

 

신미양요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리고 6월 2일(음력 4월 15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6월 10일에 상륙해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 이어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미군은 6월 11일(음력 4월 24일)에는 덕진진()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다음날에는 첨사(使) 이염()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선박을 물리치자, 미국 측도 이 이상의 공격이 무모함을 깨닫고 5월 16일(양력 7월 3일) 40여 일 만에 불법침입한 우리 해역에서 물러갔다. 이 결과 대원군은 척양척화()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어 온 나라 안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한층 굳게 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