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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흥선대원군 이하응 쇄국정책을 펼쳤다 <통상수교거부정책>

by 무님 2020.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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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정책이란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 않는 것으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 한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폐쇄적인 사대교린관계만을 유지하였다. 더욱이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이 통상무역을 요구해옴에 이르러서는 좀 더 완강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근대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은 일찍부터 면업을 기축으로 산업혁명을 완료하고, 1820년대에 나타난 과잉 생산으로 최초의 공황을 맞으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나라들의 아시아 진출의 목적이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의 획득에 있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리하여 아시아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형성은 중국과 일본의 개항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오직 조선만이 세계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19세기 초 이래로 조선의 해안지방에는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의 상선과 무장함대들이 빈번하게 출몰하였다. 그 중에서도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의 침범이 더욱 심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과      척화비

 

 

이러한 상황에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대원군 이하응()이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하여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외래 자본주의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하려 하였다.

대원군은 중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봉기 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침공 등의 사건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은 문호를 개방한 때문이라 믿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방법은 국내 인민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집권 첫 시기부터 청나라와의 사대적 외교관계 이외의 모든 대외관계를 차단하였다. 대원군은 당시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일본의 메이지정부()를 서양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인정하고, 종래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통적인 교린관계마저 거부해 버렸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다. 잇따라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 ).”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하였다.

 

 

척화비는 길이 4 5,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 재료 화강석. 1871년 건립. 비석 표면에 “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을 큰 글자로 새기고, “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가고, 개국을 하게 되자 철거하거나 파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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