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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조선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by 무님 2020.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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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고종 5년(1868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년 - 1903년)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掘塚) 사건이다. 덕산 굴총 사건이라고도 한다.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 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1827년 ~ 1903년) 신부를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인 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했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內河)의 퇴조(退潮)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분노한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궤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內應) 향도(嚮導)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페르트는 돌아오는 길에 인천 영종도에 들러서 프랑스제독 알리망(Allemagne, )의 명의로 “귀국의 안위는 존하()의 처단에 달렸으니 대관을 파견 교섭하자.”라는 내용의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은 도굴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와는 성기(:음성과 기색)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을 되돌려주었다.

 

 대원군은 서방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초기엔 개방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가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사회에서 서양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원군 입장에서도 서양과 수교를 맺는 건 조선의 백성과 왕족을 능멸한 문화권 사람들과 손을 잡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정치는 명분이 매우 중요한데 결국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인들이 개방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 더욱 부정적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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