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조선 11대 중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씨이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맏아들 복성군이 있었지만, 정비의 소생인 인종을 왕세자로 앉힌다.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숨져 후에 문정왕후가 새 어머니가 된다. 인종은 6세에 왕세자가 되었지만, 새어머니인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낳은 후에 입지가 불안해진다. 결국 힘겹게 왕위이ㅔ 오르지만, 불행히도 즉위한지 9개월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재위기간은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서 가장 짧았다.
인종의 본래 이름은 이억이였다. 인조의 어머니인 장경황후는 인종을 낳은 지 불과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는 눈을 감기 전 남편인 중종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 장경왕후가 이르기를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상(중종)이 상고하여 본즉 사실이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 <중종실록>
그러면서 반드시 아이 이름을 '억'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억이 들어간 이름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임금의 이름을 아무나 쓸 수 없으니 다른 사라들이 함부로 말하거나 쓸 수 없는 게 바로 임금 이름이라 매우 까다로왔다.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실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옫록 피휘(이름을 피하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종의 이름도 원래는 '이억'이었지만, 왕세자로 책봉되던 6세 때 '이호'로 개명 되었다.
인종은 3세 때부터 책을 읽을 정도의 신동이었다. 6세에 왕세자로 책복이 되고, 1522년인 인종 나이 8세에 성균관에 입학한 후 30세에 왕위에 오를 때까지 24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인종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정치적으로 후견해 줄 누구 하나 없이 외로웠다. 실제로 유독 인종 주변에는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과 기를 쓰는 왕의 여인들이 많았다. 특히 중종이 총애하던 경빈 박씨는 후궁이지만 중종의 장남인 복성군을 낳았고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다.
1527년은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 이는 세자에게 저주를 하였던 사건이었다.
1527년 2월 29일 세자의 생일날, 세자가 머무는 동궁 뜰에서 끔찍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쥐 한마리가 입, 눈, 귀가 모두 불에 탄 끔찍한 모습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쥐띠였다. 따라서 동궁 뜰에 불에 탄 쥐가 매달여 있다는건 세자를 저주한 거로 해석되었다. 게다가 그 옆에 세자의 생년월일과 세자를 저주하는 내용이 쓰여진 종이가 함께 있었다.
중종은 이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내었다.
" 상이 깜작 놀라면서 이르기를
'동궁에 이런 요괴스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즉시 추문해야겠다."
이 사건의 '작서의 변'이라고 하는데 당시엔 범인을 잡지 못 했다. 하지만 궁권 사람들은 모두 경빈 박씨를 의심하였다.
이 사건의 범인은 1532년 이종익의 상소에 의해 밝혀지는데 진범은 당시 권세가였던 김안로의 아들 희였다.
인종은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해,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었다. 서형(庶兄)인 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해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해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이렇듯 효심이 지극한 인종은 아버지가 승하하자, 단식을 한다. 문제는 단식으로 인해 거식증에 걸렸다는 일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인종은 아버지 중종의 상례 중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금식을 했다. 게다가 곧바로 제사며, 사신접대 든 왕으로서의 빡빡한 일정을 수행했다. 이로인해 인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1545년(인종 1)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의 明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죽었다.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 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뒀다.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같은 해 10월 15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靖陵)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 정릉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禧陵)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
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한 데다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을 소홀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1577년(선조 10) 11월 29일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묘호(廟號)는 인종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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