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두 번째 적자로 어머니는 문정왕후 윤씨이다. 인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승하한 후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13대 임금, 명종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다. 그 시기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의 부정부패가 심했고, 을사사화가 발생하는 등 사화가 극도로 어지러워진다.
명종의 재위기간은 1545~1567년이다. 이름은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中宗)의 둘째 적자(嫡子)이며 인종(仁宗)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와는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坡平) 윤씨였지만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민감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리권자였던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에서는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고 칭했다
처음 인종이 세자로 책봉될 때 문정왕후는 표면적으로 이를 옹호하였으나 자신이 명종을 낳자 왕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은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언제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인 명종을 세자로 옹립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에는 김안로가 실각하고 문정왕후 세력인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계승 문제는 일단락 되어 윤임이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윤임은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을 등용하여 그 기세를 회복하는 듯 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세가 급반전하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인 정난정의 도움을 받아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와 맞서 싸우며 억척스럽게 아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인종이 일찍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소윤파가 정권을 잡게된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나라의 실권을 잡은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그의 조카이자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소문을 내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桂城君)의 양자(養子)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하고 이들의 일가는 물론 그들을 따르던 사림을 유배시키는 이른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외척 간의 갈등에 휘말린 수 많은 사림 세력들은 또 한번 많은 목숨을 잃게 된다.
" 명하여 의금부 낭청을 보내어 윤임은 성산에서<양화진 근처>, 유관은 과천에서, 유인숙은 문의에서 추참하고 3일간 효수한 다음 그 수급과 수족을 사방에 돌려 보이게 하였다." <명종실록>
효수란 죄인을 죽여 머리를 밴 후 그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놓는 형을 말한다. 죄인을 2번 죽이는 것이였다. 어마어마한 피비린내를 통해 정적을 없앤 문정와후와 그의 외척들은 인정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해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 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 13세에 죽고, 왕위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선조이다
강릉(康陵)은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의 능이다. 강릉은 태릉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영역 안에 자리잡고 있지만, 태릉과는 달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지 않다. 현재 군사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태릉과 연결되는 내부 통로도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태릉 앞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삼육대학교 앞 왼쪽 도로변에 있는 낮은 담장 한쪽으로 제한된 출입이 가능하다. 출입구를 통과하여 한적한 길로 접어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홍살문이 보이고 길옆으로는 금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홍살문 너머 참도가 끝나는 곳에는 정자각이 있다. 이 전각은 이웃한 태릉의 보수한 정자각보다 훨씬 고풍스럽고 편안한 느낌이다. 아마 비공개 지역인 까닭에 크게 손대지 않고 관리만 해온 것이 오히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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