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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명종, 대윤과 소윤의 싸움, 을사사화

by 무님 2020.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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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 9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승하하고 13대 왕으로 명종이 즉위를 하게 되면서 권력다툼의 끝을 보여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을사사화라 할 수 있다. 을사사화는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거기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의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그 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김안로()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문정왕후()측의 세력인 윤원로()·윤원형 형제는, 김안로가 실각한 뒤 다시 등용되어 점차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국은 윤여필()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친정인 대윤()파와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파로 갈라져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장경왕후에게 원자() 호()가,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 환()이 각각 탄생하자, 김안로의 실각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득세한 윤원로·윤원형 형제()는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와의 사이에 대립과 알력을 빚게 되었다.

 

인종 즉위 뒤 정계는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소윤측은 대윤측에 의해 큰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의 즉위와 함께 유관()·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들이 인종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고, 이조판서 유인숙()에 의해 그 파의 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기묘사화 이후 물러났던 사림들이 다시 정치에 참여하였다. 또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 사림들은 소윤인 윤원형 일파에 가담함으로써, 사림은 대윤과 소윤의 양세력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립을 하게되었다.

 

중종이 붕어하자 인종이 즉위했다(1544년 11월 20일). 그러나 29세의 젊은 국왕에게 가장 큰 문제는 건강이었다.

즉위 직후 의원은 국왕의 맥박이 약하고 낯빛이 수척하다는 진찰 소견을 밝혔다(1545년 윤1월 9일). 그 뒤 눈이 붓고 극도로 여윈(4월 27일) 국왕은 즉위한 지 9개월도 안되어 속절없이 붕어했다(7월 1일). 험난한 권력 투쟁 끝에 인종의 즉위로 기선을 잡았던 대윤은 순식간에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되면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 즉위 직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재등용된 윤원로는, 대윤인 윤임 일파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이, 망언을 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오히려 파직, 해남(海南)에 유배되었고 대윤이 정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측의 뒤이은 음모는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즉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붕(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芑),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 岏)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주살되었다. 그 외 윤임의 사위인 이덕응()의 무고로 이휘()·나숙()·나식()·정희등()·박광우()·곽순()·이중열()·이문건() 등 10여 명이 화를 입어 사형 또는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이덕응도 사형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의 농권을 비방하는 뜻의 양재역 벽서가 발견되어, 봉성군 송인수 등이 사형, 이언적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는 정미사화와, 이듬해 홍문관박사 안명세()가 을사사화 전후의 시정기()에 윤임을 찬양하였다 하여 사형되는 등,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다. 1498년(연산군 4)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다.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약해졌으나, 후에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림파는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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