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이 재위하던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이다. 밖으로 왜의 침입이 있었은데 이를 을묘왜변이라 한다. 안으로는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다. 임꺽정의 난은 16세기중반 황해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무장대의 활동으로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중에서도 꽤 장기적으로 지속된 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활동기록이 보이는 것은 1559년(명종 14)부터이다. 본래 황해도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그 비용을 대느라 다른 도에 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 임꺽정이 활약한 봉산·재령에서는 바닷가에 있는 갈대밭마저 권세가들이 차지하여, 갈대로 삿갓과 삿자리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는 백성들은 갈대를 사 써야 했다.
당시 임꺽정은 갈대를 엮어서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나중에는 이 갈대를 돈 주고 사는 지경까지 이른다. 길가에 자라는 풀을 돈 두고 사야 한다니, 당시 조선의 부패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 알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흉년이 몇 년째 지속되었다. 오죽하면 임꺽정이 활약하기 전, 명종 12년인 1557년의 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사신은 논한다. 지금 수재와 한재가 잇달아서 백성이 항업을 잃은 데다가 수령이 탐학스럽고 부역이 번거로우니 백성들이 도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금을 박하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는 데는 힘쓰지 아니하고 포획해서 죽여 없애는 것을 급하게 여겼으니 백성을 그물질하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애석하게도 백성의 항업을 마련해 주는 법을 건의 하는 자가 없다. " <명종실록>
난의 주동자였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일찍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되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다.
결국 관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이라는 무장을 내세워 추적하게 했지만, 임꺽정과 그의 무리들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들어가고 나간 것을 헷갈리게 만들어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추적에 나선 선전관은 구월산에서 임꺽정 무리들의 발자국을 발견했지만, 들어간 것을 나간 것으로 잘못 알고는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임꺽정 무리들의 약탈 대상은 이른바 부자들이었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이었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꺽정 기사는 상당부분 가짜 임꺽정을 진짜로 둔갑시켜 출세를 해보려는 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1561년 1월 3일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이 잡은 인물은 형인 가도치였다. 이들은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가도치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이사증의 뒤를 이은 인물이 의주 목사 이수철이다. 이수철은 임꺽정과 한온을 붙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가 잡은 인물은 윤희정과 윤세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꺽정 무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고문에 못 이겨 죄를 거짓 자백한 후 사형을 당했다. 당시 의주 목사 이수철도 이들이 임꺽정과 한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갖 고문을 동원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고, 늙은 노파를 잡아다가 임꺽정의 아내라 하며 인두질을 해댔다. 사실이 드러난 이후 이수철은 파직처리 당했지만, 이들 외에도 임꺽정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관리들은 넘쳐났다.
명종은 선전관과 금부 낭청에게 임꺽정을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로 두려워했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남치근이 구월산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모아 임꺽정 무리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임꺽정 무리 가운데 일찍이 체포되었던 서림(徐林)이 길잡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림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산을 넘어 도망치고 급기야 한 촌가로 숨어들었다. 촌가를 관군이 포위하자 임꺽정은 집 주인인 노파에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위협했다.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나가자 군인 차림으로 변장을 한 임꺽정이 노파를 뒤쫓으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고 외쳤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일제히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군사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이 “임꺽정이다”라고 외쳤고 이후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림이 배반한 것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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