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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4대 왕 선조 - 이균, 이연... 방계출신이 왕이되다

by 무님 2020.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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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1552년에 태어나 1608년에 사망했다. 그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이다. 선조는 조선 11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인종, 명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명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이 되었는니, 조선 최초로 방계 출신의 임금이기도 하다.  본래 이름은 '균'이었으나. 당시 중국 명나라 황제의 이름이 '주익균'이었기 때문에, '연'으로 개명한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에 조선 왕조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선조의 시호는 소경()이며, 덕흥대원군() 초()의 셋째 아들이니 즉 중종의 손자(셋째 아들 계)이다(중종의 첫째 아들은 12대 인종, 둘째 아들은 13대 명종). 어머니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세호()의 딸인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며, 비()는 박응순()의 딸 의인왕후(), 계비()는 김제남()의 딸 인목왕후()이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왕다운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에게는 일찍이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563년(명종 1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선조실록]이나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등에는 하성군이 여러 왕손들 가운데 명종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기록에는 선조가 왕위에 오른 배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명종은 여러 왕손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왕손들을 교육하다가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아보려고 하니 익선관을 써보아라”하였다.

다른 왕손들과 달리 하성군은 제일 어린 나이였는데 두 손으로 익선관을 받들고는 쓰지 않고 어전에 도로 갖다 놓았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린 선조의 말을 들은 명종은 기특하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했다고 한다. 남달리 선조를 이뻐한 명종은 한윤명·정지연을 사부로 삼게 하고 학업에 매진하도록 배려했다.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갑작스레 쓰러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한 심통원 등이 의식이 희미한 명종에게 후사 결정을 종용했고, 말을 하지 못하는 명종은 간신히 한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은 명종의 마지막 손짓이 내전, 즉 중전에게 물으라는 것으로 해석했고, 중전은 병풍 안에서 일찍이 명종이 위독했을 적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순회세자를 잃은 후 명종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라의 국본()이 정해지지 않자 주변의 신하들은 명종을 무던히도 괴롭혔을 것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목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뜰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했을 경우 후계자를 지목할 권한은 대비나 중전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당시 하성군뿐 만 아니라 풍산도정 이종린, 하원군 이정, 전 하릉군 이인 등 후보들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하성군은 두 명의 친형을 비롯하여 여러 왕손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진정 그를 총애한 사람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였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고종과 함께 무능한 왕으로 알려진 선조(, 1552~1608, 재위: 1567~1608).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 사건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후 조선사회는 무너져 내렸다. 최근에 와서 선조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다는 복권(?)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기에는 반론이 약하다. 과연 선조는 무능한 왕이었을까.

선조의 40년 재위기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알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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