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즉위하고 훈구세력이 약해지며 사림의 시대과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시작된다. 그런데 동인은 한번 더 갈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한번 더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바로 1589년에 이러난 <정여립 모반사건>이다.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그 뒤 여러 하위직을 거쳐 37세 때(1583) 예조좌랑(정6품)이 되었고, 이듬해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올랐다. 이때까지는 흠잡을 데 없는 순탄한 출세였다. 무엇보다도 정여립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인(西人)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년에 와서 급변했다. 1584년(선조 17년) 수찬이 된 뒤 이이ㆍ성혼ㆍ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이런 급변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문제 삼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이런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1544∼1589)과 좀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런 행보는 그가 직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그 뒤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제시된 주요한 증거는 대동계의 조직과 활동이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 조직의 군사적 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1587년(선조 20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출동해 물리친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전라도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謀士)들이 모여들었다.
좀더 중요한 측면은 정여립의 생각이었다. ‘대동계’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어떤 변혁의 지향을 읽을 수 있지만, 정여립은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각각 중국 전국시대 때 왕촉(王燭)과 맹자(孟子)의 발언이지만, 그것을 먼 후대의 왕조국가에서 거론하고 지지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런 측면에 주목해 정여립을 혁명적인 사상가로 높이 평가했다.
1589년인 선조22년 황해감사 한중으로부터 조정에 장계가 올라왔다. 선조는 급히 조정의 정승들을 대궐에 불러 황해감사로부터 올라온 장계를 그들에게 조여 주었다. 그 내용은 안악군수 이축 등이 역모를 고변한 것으로 주모자는 정여림이었다. 정여립의 역모 소식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동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여림은 동인에 속했던지라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해 왔던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자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역모 소식에 놀란 조정은 급히 체포대를 보내 정여립을 잡아오게 했지만, 정여립은 같이 갔던 변숭복과 자신의 아들 옥남을 죽이고 자신도 칼을 거꾸로 세운 다음 자살을 했기때문이다. 즉, 주모자였던 정여립이 자살했으니 진실 여부는 알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정여립 주변의 사람들을 고문하여 역모의 진상조사를 실시했지만, 아무래도 고문을 통한 진상조사이기 때문에 허위 자백을 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비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이 집권세력인 동인을 몰아내기위해 만든 거싲 시나리오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 시나리오를 기획한 이로는 서인의 지도자였던 송강 정철이 지목되고 있다. 정여립은 동인쪽 사람이었기에, 정여립 사건에 대해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조는 정여립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했거나 관련된 인물들은 다 죽여 버렸다. 특히 남명 조식의 문화생 중에 정여립과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와 달리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은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황과 조식의 문하생들이었던 동이세력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학맥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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