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서 4번째로 즉위기간이 긴 왕이였다.
영조의 재위기간은 51년 7개월 ( 1724 ~ 1776 )
숙종의 재위기간은 45년 10개월 (1674 ~ 1720 )
고종의 재위기간은 43년 6개월 ( 1863 ~ 1907 )
선조의 재위기간은 40년 7개월 ( 1567 ~ 1608 )
선조 시기에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사림의 시대>가 시작 된 것과 붕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림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된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이다. 제 9대 왕인 성종 대부터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제 10대 연산군부터 제 13대 명종 대까지 총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림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제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사림들은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어 학문이 더욱더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논쟁이 심화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조정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물러나 있었던 인물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기 시작했다. 명종이 불러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선조가 즉위한 다음달인 7월에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임명되었고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직제학이 되었다. 반면에 명종과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정권을 농락하던 윤원형 등 권신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선조 초반에는 명종의 고명을 받은 이준경과 인순왕후의 아우로 외척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핵심 세력이었다. 결국 이들 간의 알력은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었다.
1572년(선조 5년) 2월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사림을 대표하는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였다. 그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이유는 과거에 김효원이 권신인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김효원이 낙마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이조정랑은 정5품의 관직으로 비록 품계는 낮은 자리이지만 인사 행정을 담당한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말하자면, 인사권이 이조판서에게 있지 않고 이조정랑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로 이조정랑의 자리는 막강했다. 이조정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정랑직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자신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심의겸에 대해 김효원도 앙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김효원의 눈에 비친 심의겸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척신일 뿐이었다. 그러던 사이 김효원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조정랑 자리에 올랐다. 이조정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가리켜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때가 없다”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악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거론되자 발끈한 김효원이 이중호의 아들 이발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결국 선배사림과 후배사림의 분열이라 일컬어지는 ‘동서분당’으로 이어졌다.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천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서인이라 했다. 동인들은 유성룡·김성일·이발·이산해·이덕형 등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은 정철·송익필·윤두수·신응시 등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았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이이가 죽은 뒤로는 ‘동인천하’의 세상이 되었다.
선조는 김효원을 경흥부사에,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 조치는 김효원에게 불리하였다. 그는 그때 병을 앓고 있어 변방의 경흥부사로 마땅하지 않아 이이가 다시 선조에게 건의 하여 김효원은 삼척부사, 심의겸은 전주부윤에 임명한다. 이이의 중재로 동인과 서인의 대림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1584년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으로 세력다툼을 벌인다.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이발, 백유양 등이 동인에 가세하여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동인이 조정을 대부분 장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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