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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5대 왕 광해군 - 이혼

by 무님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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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했다.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으로 15년 1개월이다.

조선의 제 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후궁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다. 그런데 임해군은 성품이 포악해 광해군이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야 세자초 책봉된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저재으이 총사령관 역활을 충실히 하며 백성들을 위로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 선조와 새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위 세습의 위협을 받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선조가 승하하면서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기전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을 나누다’ 또는 ‘조정의 분소’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와 평양 등지에 상주하였던 선조()가 있던 원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써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발발 몇 해 전 정철() 등이 건저의(,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제기, 정치적 파란이 있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결국 부리나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분조의 책임자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분조의 활동 등으로 임진왜란 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내심 세자의 자리가 굳건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하여, 선조가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더구나 평소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였기에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유영경 같은 이는 세종 때 고사를 원용해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기도 할 정도였다.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간혹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루는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족자에 대나무를 그렸다. 하나는 바위 위에 왕대()가 늙어 바람과 서리를 겪어 꺾이고 마르는 모습이요, 또 하나는 악죽()이 왕대 곁에서부터 뻗어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데, 긴마디가 한 치를 넘어, 너럭바위를 넓게 점거한 채 꾸불꾸불 서리서리 엉킨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 돌 위에 왕죽의 원줄기로부터 뽑혀 나와 어린 가지와 연한 잎이 비록 아직 장성하지는 못했으나, 싱싱하고 운치 있는 바른 죽순이 하늘을 찌르고 달을 희롱할 기상이 있었다.

며칠 뒤 선조는 이항복ㆍ이덕형ㆍ유영경ㆍ이홍로 등을 인견하고는 내시에게 족자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며 이르기를, “내가 병중에 우연히 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어떠한가?”라며 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기함을 칭송할 뿐이었으나 유영경이나 이홍로 등은 선조의 의중을 간파하였으니, 이홍로 같은 인물은, “전하의 오늘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죽은 선조를, 악죽은 광해군을,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한 것인데, 이홍로나 유영경은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었다. 심지어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하는 것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의 손을 들어 주어 큰 변화없이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도처에 산재하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안 되어서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연릉부원군 이호민과 오억령등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국과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비의 승하나 책봉 등이 있을 경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를 통보하고 그에 합당한 조서 등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에게 장자가 되는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호민 등이 이런 저런 이유를 말했으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급기야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결국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순탄치 않은 왕좌였다.

임해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여 광해군의 왕위가 바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배다른 형제로 적자인 영창대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에게 엉뚱한 방향에서 호기가 다가왔다. 1613년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박응서 등이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흔히 “칠서지옥()”이라 한다. 체포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된 뒤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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