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준 - 기준[奇遵, 1492(성종 23)~1521(중종 16)]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자경(子敬) 혹은 경중(敬仲)이고,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이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아버지는 응교 찬홍이고, 기대승(奇大升)이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와 매우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다. 1513년(중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합격, 사관을 거쳐 홍문관정자로 초계문신이 되었고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 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하였으며, 검토관·수찬·검상·장령·시강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7년 이성언(李誠彦)이 대간(臺諫)의 소를 비판하여 대간들이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소를 올려 이성언을 강력히 규탄하고 대간을 옹호하는 한편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하여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온성에 유배되었다. 1520년 모친상으로 귀향하였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일어난 신시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유배당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1545년(인종 1)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온성(穩城)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덕양유고』(德陽遺稿)·『복재집』(服齋集)·『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복재집』은 애초에 『덕양유고』로 출간한 것을 증손 자헌(自獻)이 보완해서 1599년(선조 32)에 간행하였다. 시를 잘 지어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 등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2. 김감 - 1466(세조 12)∼1509(중종 4).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헌(子獻), 호는 일재(一齋)·선동(仙洞).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수(金脩)이고, 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김원신(金元臣)이며, 어머니는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었고, 이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용되었다. 1492년에는 유숭조(柳崇祖)·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천문·역법을 연구하였다. 1498년 홍문관부교리에 올랐고, 이어서 교리·응교·전한·직제학을 역임하고, 1501년(연산군 7)에 부제학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가 되고,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성균관사·지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 등을 겸하였다. 임사홍(任士洪)과 더불어 갑자사화를 다스려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져 금표(禁標)를 세워 도성 주변의 백성을 먼곳으로 이주시키고 사냥을 일삼을 때 금표 안내문을 지었고, 추천시(鞦韆詩)로써 연산군에 아첨하였다. 그 뒤 의정부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로서 경상도관찰사를 겸임했고, 연산군에 충성을 서약하는 경서문(敬誓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중종반정에 협력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1507년(중종 2)박경(朴耕) 등이 박원종(朴元宗) 등을 도모하려는 모의에 연좌되어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혐의가 풀려 연창부원군으로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담당하다가, 1509년에 죽었다.
중종반정 이후 줄곧 연산군 때의 총신이었다는 이유로 사림에 의해 지탄을 받았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 김안정 - 1476(성종 7)∼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진경(震卿).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우신(金友臣)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흔(金訢)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지(尹墀)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고, 150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副修撰)·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館), 정언(正言)·병조좌랑·호조좌랑·강원도도사·중추부도사·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부모가 연로하여 지방에 나가 봉양하고자 양산군수를 자원하였다. 1521년 다시 중앙에 돌아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고,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그 뒤 집의(執義)·전한(典翰)을 역임하였다.
1524년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허공교(虛空橋)에서 야인에게 패한 이함(李菡)·한규(韓珪) 등의 죄상을 추국(推鞫)하고 이들을 각각 웅천(熊川)과 순천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1525년 좌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1529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30년에 도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532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성품이 순수하고 신중하며 곧아 행동에 교만하거나 꾸밈이 없었고 과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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