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가면 코끼리를 흔하게 보지만, 예전에는 코끼리가 매우 귀했다. 원래 아프리카나 인도 등에서 기르던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길들인 코끼리(즉 순상) 한 마리를 일본에서 보내 주어 기록상에만 보았던 코끼리의 실물을 처음으로 대하였다. 태종 11월 2일 일본 국왕이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자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였다.
코끼리는 날마다. 콩 4~5말을 먹어 치웠다고 한다. 코끼리가 들어온 이듬해 12월에 공조 저서를 지낸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코끼리를 보고는 꼴이 추하다며 비웃고 침을 뱉었다. 코끼리가 화가 나서 그를 밟아 죽였다고 한다. 성격이 온순한 코끼리가 자리를 모욕한다고 여기고 응징을 하였다니, 화가 나도 엄청나게 났던 것 같다. 그 후에도 코끼리를 기르던 중에 차여서 죽는 일도 있었다. 코끼리가 사람을 패치고 곡식을 먹어 치우자 신하들은 모두 코끼리를 싫어하여 완전히 애물단지 취급을 했다. 급기야 2년 후인 태종 13년 11월에 병조 판서 유정현이 코끼리를 전라도의 섬으로 옮겨야 한다고 진언하여 윤허를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 바친 길들인 코끼리는 성상이 좋아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해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형이 마땅합니다. 일 면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석에 이릅니다. 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로 옮겨 두도록 하십시오."
임금이 좋아하지도 않고, 먹이를 너무 많이 소비하여, 더구나 사람까지 죽인 코끼리를 섬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불쌍한 코끼리는 귀양을 가듯이 섬으로 쫓겨나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에 방목되었다. 수초를 잘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 상태를 보고하자 임금은 이듬 해 5월에 코끼리를 육지로 내보내게 하였다. 섬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 코끼리는 거의 반년만에 육지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육지로 나온 코끼리는 전라도의 네 고을에서 돌아가면서 기르다가, 세종 2년 12월부터는 다시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번갈아 기르도록 하였다. 그러다 육지로 나온 지 네 달 만에 충청도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섬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세종 3년 3월에 충청도 관찰사가 올린 자예는 이러했다.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나라에 유익함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 듭니다. 1년에 소비되는 쌀이 28석이고, 콩이 1말 듭니다.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석이고, 콩이 24석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쳐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됩니다.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십시오."
사람을 죽이고 곡식을 과소비하며 이익도 없어 도로 섬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코끼리를 내놓고 병들어 죽기 말게 하라."
임금이 윤허에 코끼리는 육지로 돌아온 지 7년 만에 다시 섬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조선에 딱 한 마리 있었던 코끼리는 불우한 일생을 살아야 했다. 자기들이 보낸 코끼리가 부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일본에서는 더 이상 코끼리를 보내지 않았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보내진 것만도 서러운데, 그것도 부족하여 조선에서 괄시를 당하고 육지와 섬으로 쫓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코끼리에게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은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고, 중국에서는 코끼리가 궁궐 문을 시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희귀한 코끼리에게 먹이도 제대로 주지 않고 방치하다시피 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길러서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백성들에게도 구경시켜 주려는 생각을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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