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선운사를 알게 된 건 송창식의 < 선운사 >라는 노래 구절에서 시작된다. 무심히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의 가사가 하루 종일 입에 맴돌았다. 선운사의 가신적이 있나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 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
그래서 였다. 가 본적없는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고 싶었다. 눈물처럼 동백꽃이 떨어진다는 선운사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가 선운사를 가게 된 시기는 가을의 어느 날 꽃무릇이 흐드러지게도 피었있던 시기였다. 눈물처럼 떨어지는 동백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들판 가득 빨아간 꽃무릇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선운사는 주차장을 차를 세우고 매표소를 지나면 잘 닦여진 넓은 산길을 걸어 들어가면 된다. 옆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과 색을 잎은 나무들과 수다 떠는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절의 잎 구에 도착해 있다.
선운산, 일명 도솔산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평소 친하던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한다.
다분히 후대에 형성되었을 창건설화에 따르면, 죽 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올리려 했으나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 부처, 금 옷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모시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라고 씌어 있는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던 지금의 절터를 메워 절을 세웠고, 이때 진흥왕은 재물을 내리는 한편, 장정 100명을 보내 공사를 돕고 뒷산의 소나무로 숯을 구워 경비에 보태게 했다.
하나의 설화는 또 다른 전설로 이어져, 동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는 자연 석굴은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우던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 가느라고 뚫어놓은 것이라 하여 용문굴이라 불린다.
한편, 절을 세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는 이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 반성한 도적들이 소금을 구우며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전까지도 그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그 후 고려 충숙왕 5년(1318)과 공민왕 3년(1354)에 효정 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찰 되었다. 조선 성종 14년(1483)에는 행 호선 사가 쑥대밭이 된 절터에 서 있는 구층 석탑을 보고 분발하여 대대적으로 중창했지만 정유재란을 맞아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광해군 5년(1613), 무장 현감 송석 조가 원준 대덕과 함께 3년에 걸쳐 절을 재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산과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절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선운사의 절집을 들어가려면 낮으막한 흙돌 담을 따라 좀 걷고 나서야 천왕문을 만날 수 있다. 대게의 사찰은 걸어오는 길 쪽으로 문을 만들어 바로 들어가게 돼있는 반면 선운사는 계곡을 끼고 돌담을 걸어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더 운치를 만들어 준다. 또한 다른 절은 천왕문을 지나고 또 다른 문을 지나야 대웅전에 볼 수 있게 되어 있다면 선운사는 천왕문을 지나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마당을 끼고 전각들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선운사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이웃 언니 같은 느낌이었다.
선운사의 마당 둘레로 절집들이 앉아 있는데 유독 마당 한가운데에 앉아 천왕문을 들어서며 보게 되는 절집 < 만세루 >가 있다. 만세루는 절의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나 아직도 700년이나 된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이 건물의 기단은 석조로 세웠으며, 대들보와 기둥은 원목을 가공하지 않고 나무 형태를 유지하여 건축에 사용함으로써 자연적인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건물 내부에는 각종 사적기(事蹟記)와 현판이 16개나 걸려 있다.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3호이다
선운사의 < 대웅보전 > 은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 회상도·약사 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소조 비로자나 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 석가여래 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 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 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 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 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대웅보전의 바로 옆에 있는 절집 < 영산전 >은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고 1821년과 183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장육전이라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큰 불상이었기 때문이며,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선운사는 많은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과 천수천안관세음 탱화,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1991년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관음전,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한 명부전, 선운사의 산내 암자 가운데 하나로 그 격이 떨어졌으나 선운사의 여러 사암(寺庵)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본래의 이름도 참 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라고 불렸던 큰 사찰이며 의운(義雲) 선사에 의해 창건된 절집 참당암도 있다.
처음 필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선운사를 다녀왔을 때에는 도솔암의 유명한 마애불도 알지 못했었다. 고창 여행으로 선운사에 몇 번을 가게 되었을 때 자료를 찾다가 마애불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얘기들을 알게 되었다. 선운사를 나와 도솔암에 오르는 길 절벽에는 거대한 마애불상 있다.
도솔암 마애불의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 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 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선운사 도솔암 왼편 칠송대라 불리는 암벽에 양각되어 있는 미륵 좌상으로 머리 위 암벽에 사각형 구멍이 10개 이상 있으며 부러진 목재들이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東佛庵)이란 공중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을 ‘동불암 마애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배꼽과 같은 돌출부가 있다. 그 돌출부에 비기가 들어 있는데, 이 비기를 꺼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곧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마애불의 배꼽을 열어 보기 전부터 복장 감 실을 둘러싼 전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곳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 살도 들어 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이서구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다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들이 열어 보고자 하였으나 벽력이 무서워서 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장 지역에서 최대 동학 조직을 가지고 있는 손화중은 동 학교도들과 함께 이 비기를 꺼냈다고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92년 이 비결을 당시 고창에서 동학을 포교하던 손화중이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화중의 접(接)에만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고창 지방에서 손화중이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를 말해 주는 것이며, 손화중 포(孫化中包)에서 비결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점은 추측해 볼 수는 있으나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 사실에 대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이 일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선운사를 처음 보았을 때 단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했다. 절집과 절집이 자리 잡은 모양새나 자기에 돋보임을 내세우진 않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자꾸 눈이 가게 되는 절, 우러러보지 않도록 어려워하지 않도록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듯한 절, 이것이 선운사를 처음 봤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느낌이 변함이 없다. 간절함을 담아야 가게 되는 곳이 아니어도 절집을 들어서 대웅보전을 먼저 찾아 절부터 오려야 할 것 같지 않아도 언제든 편안히 앉아 바람을 느끼고 오고 싶은 곳이 선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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