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흥국사는 필자도 딱 한번 가봤던 곳이다. 그래도 이곳을 올리는 건 아직도 그날의 기억때문이다. 여수 향일암편에서 쓴 것처럼 여수 시티투어를 한적이 있을 때였다. 그날 투어버스에는 다섯명이 타고 있었다. 다섯 중에 둘이 나와 작은 아이였다. 이때도 큰 아이가 뜨거운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런 집 부위기에 힘들었을 작은 아이와 함께 한 여행이였다.
향일암에 올라 가이드를 설명을 듣는 도중 해수관세음보살이 있는 곳을 오게 되었다. 필자는 여수에 올때면 해수관세음보살을 찾아 절을 하는데 이날도 그랬다.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도 거의 없었고 나는 작은 아이에게 함께 초를 올리고 절을 하였다. 그런데 가이드는 이런 나와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였던건지 아님 독실한 불교신자로 생각했던건지 버스에 올라 다음 장소가 아주 오래된 고찰 흥국사라며 여러가지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흥국사 절에 들어갔을데 나와 아이를 보면 이곳이 아주 오랜된 고찰이라 절을 하고 가면 좋다면 권하였다. 솔직히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콕 집어 우리에게 얘기를 하니 안 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 다시 새로운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흥국사로 가던 길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스를 타고 여수에선 흔하게 볼 수없는 공장들을 지나 산으로 올랐갔던 기억이 난다. 흥국사는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화엄사의 말사(末寺)다. 말사란 화엄사의 관리를 받고 있는 절이라는 얘기다. 1196년(명종 26) 지눌(知訥)이 창건하였으며,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 하였다고 한다. 즉, 변방의 국찰(國刹)로,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 불법 그 자체보다는 호국을 우선으로 한 사찰로 창건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려시대의 젊은 학승이 백일기도를 마친 뒤, 기도의 회향축원문(廻向祝願文)에 흥국기원(興國祈願)은 빠뜨리고 성불축원(成佛祝願)만을 넣었다고 하여 이 지방의 향리에게 벌을 받고 다른 절로 쫓겨났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또한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승군은 수군, 곧 해군이었다는 점이다. 영취산 너머 여수에 있던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전라좌수영이 호남 수군의 본영 역할을 했으므로, 흥국사의 의승수군(義僧水軍) 전력이 어떠했을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흥국사의 의승수군 활동은 절에서 발견되는 각종 상량문과 비문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승군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에는 700명으로 조직되었다가 이듬해부터 300여 명 정도로 정비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1812년까지 해체되지 않고 있다가 구한말로 접어든 이후로 차츰 줄었다고 한다. 전쟁시 이들의 활동은 주로 지역경계 근무, 조선 및 전함 수리, 군사작전 수행, 종이 만들기, 밥 짓기, 짚신 삼기 등이었으며, 전후에는 산성 축성과 보수·관리, 종이 만들기, 사원의 보수·관리 같은 일을 하였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항전활동이 두드러진 의승수군의 중심지였기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심해 전후에는 아예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흥국사가 화업사의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하여 작은 절은 아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멋진 돌다리를 건너 계곡길을 따라 오르면 아주 오래된 느낌이 흠씬 풍기는 절을 만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는 산길에는 오랜된 돌탑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 돌탑은 부도 12기가 조붓이 모셔져 있다. 창건주인 보조국사와 중창주인 법수스님의 부도가 이곳에 있다. 여기서부터 경내까지 이어지는 왕벚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흥국사중수사적기’라 쓰인 비가 서 있다. 이 사적비의 글씨는 숙종 29년(1703) 명필 이진휴가 쓴 것이라고 한다.
흥국사의가람의 배치는 대웅전(大雄殿)을 주축으로 되어 있다. 경사지 위에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봉황루(鳳凰樓), 법왕문(法王門), 대웅전, 팔상전(八相殿)이 순서대로 일축선상에 배치되었고 대웅전 전면 좌우에는 적묵당, 심검당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걷다보면 천왕문을 볼 수 있다. 천왕문을 나와 2층 누각인 봉황루가 모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각을 나오면 범종과 법왕문이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흥국사는 산에 자리하고 있지만 깊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산속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지만 오랜된 절의 모습이 산세와 어우러저 경건함이 묻어난다. 대웅전에 오르는 오래됨이 묻어난 돌계단에는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고 대웅전을 오르는 길마저 경건하게 만들어 준다.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작은 화단과 그 옆으로 자리한 석등은 계단과 함께 고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보물 제578호로 지정된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후불탱화는 석가여래가 영취산(고대 중인도 마가다국에 있던 산)에서 법회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인데, 석가모니 주위로 네 보살과 여섯 제자, 팔부신중, 분신불 등이 모임에 참여하여 법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화기(畵記)에는 조선 숙종 19년(1693) 천신과 의천이라는 두 스님이 수년 동안 완성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이 공덕으로 누구에게나 두루 비치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 후불탱화는 가로 4.75m 세로 4.06m의 대작으로, 가로가 세로보다 70㎝나 더 넓은 가로 구도이다. 그림 크기에 비해 석가여래가 좀 작고 상대적으로 보살 등 협시가 커졌으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주제를 뚜렷이 살려내고 있다. 이 불화의 또 다른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한결같이 밝은 얼굴과, 탁한 연홍색과 좀 튄다 싶은 녹청색이 고상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한 색채감각이다. 그외 꽃무늬나 옷주름의 선 또한 품위가 있다.
대웅전 안에 보관된 괘불이 있다. 역시 가로 8.2m 세로 11.15m로 보기 드문 대형작품이다. 괘불은 사찰의 큰 행사 때에나 볼 수 있을 뿐 일반인이 자주 대할 기회는 매우 적다. 화면 전체에 한 분의 보살상이 그려져 있으며, 영조 35년(1759)에 제작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색 짙은 대웅전 내부의 각종 장엄에 취해 자칫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는 벽화가 하나 있다. 대웅전 중앙불단의 뒷벽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린 수월백의관음이다. 가로 3.36m 세로 3.89m로 벽 전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은, 흰 두건을 머리로부터 내려쓰고 하얀 장삼을 걸쳤으며 아래는 하얀 바탕에 붉은 꽃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었다. 두광은 빛나는 초록색이고, 얼굴은 입이 작고 볼이 두툼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손은 자연스럽게 두 무릎 위에 얹은 반가상인데, 그 자세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 보살의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의 상징인 감로병도 있다. 이 벽화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76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을 나오면 바로 옆에 ‘無私殿’(무사전)이란 현판을 단 명부전이 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한 인과응보에 의해서 사후 심판을 받는다는 엄정함이 이름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곳의 분위기는 다소 차가운 느낌이을 받는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팔상전이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는 곳인데, 흥국사의 팔상전에는 팔상탱화가 없고 영조 17년(1741)에 그린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원래 팔상탱화를 모시고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 도난당했다.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모신 것은 이 건물이 이전에 대웅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팔상전은 숙종 16년(1690)에 대웅전을 확장 불사하면서 나온 목재들을 수습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팔상전 옆의 응진전은 부처님의 직계 제자를 모신 곳이다. 벽면 둘레에 나한상들을 모시고, 16나한의 모습을 모두 여섯 폭에 나누어 그렸는데 표정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화면을 구성하였으며, 뒷배경은 먹으로 원근을 살려냈다.
흥국사의 원통전은 가이드이 설명을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였다. 그 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전각으로, 퍽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중앙 3칸의 방을 둘러싼 사방이 퇴칸이고, 앞쪽에는 따로 정면 3칸 건물이 덧붙어 丁자 모습을 하고 있다. 사방의 처마와 앞으로 덧붙여진 팔작지붕을 각각 활주가 떠받치고 있다. 사방에 마련한 회랑식 퇴칸은 중앙법당에 모신 관세음보살을 탑돌이하듯 돌며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건물의 연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으나 1700년대 초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국사가 있는 영취산은 봄에 진달래로 온 산이 뒤덮인다고 한다. 봄에 오는 흥국사는 진달래꽃과 어우러져 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들어서는 입구의 돌다리부터 전각 하나 하나에 모셔져 있는 불상과 탱화 대웅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등 흥국사의 자리하고 있는 곳곳이 오래됨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흥국사는 보는것 만으로 경건해 진다.
사실 1시간여의 짧은 시간 보게 된 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오랜된 절에서 풍기는 신비로움 그리고 아름다움, 흥국사를 생각하면 이 두 단어가 떠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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