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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강화도의 오래된 고찰 < 전등사 >

by 무님 2020.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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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들 대표하는 절이 전등사이다. 전등사는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전등사의 창건설은 멀리 고구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 이곳 강화 전등사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유서 깊은 설이 있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였다고 전한다. 한국의 대부분의 오래된 사찰이 신라 또는 통일 신라에 지어진 것이 많아서인지 고구려시대의 사찰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논 할수가 없을 것 같다. 

 

전등사는 정족산성 안에 위치해 있어 산성의 남문 또는 삼람성문을 지나야만 만날 수 있다. 정족산은 바다와 들판을 끼고 있는 높지 않은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여 걷기에도 좋은 산으로 이 곳의 정족산성은 1866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던 역사지 이기하다.

 

강화도 전등사

 

정족산성 삼람성문으로 가는 길 성문의 바로 앞까지 즐비한 상가를 볼 수 있다. 필자는 좀 씁쓸한 마음으로 이 곳을 지났다. 사람의 먹고 사는 일이 중하다 하나 역사의 흔적을 조금만 피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삼람성문을 지나면 바로 매표소를 만난다. 매표소를 지나면 가장 먼저 양현수 승전비를 볼 수 있다. 정족산성과 프랑스군과의 전투 향현수 장군 등의 이야기는 필자의 조선이야기편에 올리기로하고 전등사를 향해 부지런히 오르겠다.

전등사로 오르는 산길은 소나무와 작은 돌탑들이 즐비해 있는데 울창하고 깊은 산속은 아니여서 편안한 산책길을 걷는다는 마음이면 족하다. 전등사는 넓은 부지에 많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각의 수가 20여개가 넘어 모두 둘러보기가 힘들어 필자는 전등사를 대표하는 보물과 전설을 흔적들을 위주로 관람을 했다.

 

전등사를 대표하는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웅보전의 옆으로 나란히 있는 약사전은 보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의 앞쪽으로 자리한 대조루는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약사전 옆으로 있는 명부전은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라고 한다.

 

전등사를 둘러보다 보면 절집 말고도 많은 역사의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우선 사고를 보관하던 정족사고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다음으로는 고려가궐지가 있다. 고려가궐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인 1259년에 세워진 궁궐터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부처님의 가피로 왕실의 안녕을 꾀하고 나아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임금의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게 했다. 그래서 전등사 경내에 고려의 가궐을 세우고 한때는 임금이 머물며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었다. 하지만 39년의 항쟁 끝에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환도를 했고 강화도에 남았던 고려의 문화유산은 몽골군에게 마구 불태워지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전등사 적묵당 옆 산기슭에 있던 가궐도 이때 폐허를 면치 못했다. 풍문으로만 남았던 고려 가궐지가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0년의 일이었다. 동양고고학연구소 소장이며 선문대학교 교수인 이형구 박사팀이 고려 가궐지를 발굴하여 건물지를 실측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수습하여 학계에 보고한 결과 전등사 경내의 고려 가궐지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울창한 숲 속에 터 잡은 널찍한 공터가 고려 시대의 풍상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넓은 절집을 둘러보고 지칠때쯤 만날 수 있는 절집안의 찻집인 죽림다원을 볼 수 있다. 아담한 연못과 어울러진 외부, 품위 있고 아늑한 분위기의 찻집 내부는 색다른 느낌주어 가족,연인,단체가 함께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장소다.

찻집에 앉아 잠시 쉬며 전등사의 유명한 전설들을 검색해 보았다. 전등사의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나부상은 전등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필자 역시 이 나부상을 보기 위해 오게 되었다. 

 

첫번째 전설 - 나부상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두번째 전설 - 500년을 살아 온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세번째 전설 - 단군의 세 아들이 세운 삼랑성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삼랑성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삼랑성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그 옛날 단군께서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군은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단군은 어느 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왕자들은 어이하려는지 자신 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에 단군께서는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과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될터 인데..?" 이에 아들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단군의 왕자들은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나타난 사람들은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들과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 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되었는데 겨우 한 달도 못되어 난공사인 산성이 이루어 졌다.

이에 단군은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 단군은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 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아들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전등사(傳燈寺)는 이 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성의 문(동문,남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가 사찰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엔 절집에 내려오는 많은 전설들을 꼽을 수 있다. 사실인듯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은 조금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설레임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등사는 둘러보는 내내 설레일 수 있는 곳이였다. 사진을 찍고 곳곳의 설명들을 찾아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냈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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